신앙생활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소 제목 : 내 자유를 사랑으로 제한하라.)
(롬 14:18-22, 갈 5:13, 고전 8:9, 롬 14:5)
신앙생활에는 본질(本質)적인 것이 있고, 비(非)본질적인 것이 있다.
본질적인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사도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그렇게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근본이다.
그래서 죄인(罪人)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가?
(엡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벧전 1: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러한 구원의 문제들이 신앙생활에 본질적인 것이다.
그런데 비본질적인 것들이 있다.
이러한 비본질적인 것들을 아디아포라(adiaphora, ἀδιάφορα)라고 한다.
이것은 선도, 악도 아니고, 십계명처럼 명령된 것도 없고, 금지된 것도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상관없는 것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음식 먹는 문제, 날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 같은 것들 등등이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는 :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들에는 자유하라(양보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과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그 자유를 갖고 자유를 누리며 그대로 살라고 하셨다.
(롬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네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그대로 살라는 말이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고 자유하게 되었다.
(요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유혹을 받고, 죄에 이끌려 죄의 종으로 살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요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6)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자유를 얻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代贖)적 은총과 부활로
얻게 된 것이다. 이런 대속의 은총으로 얻은 자유를 가지고 누리며 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그 귀한 자유를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내려놓고
네 자유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면 그를 위하여 네 자유를 제한(制限)하라는 말이다.
(롬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내 믿음으로는 구약에서 금지한 돼지고기도 먹을 수 있고, 우상 제물도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으나,
믿음이 약한 형제가 볼 때 거리낌이 되거나 실족하게 된다면 그 자유를 제한하라는 말이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주어진 놀라운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육체 욕망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너의 자유를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이다.
(고전 8:9)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렇습니다.
네 자유가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거치는 것이나 실족함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믿음 약한 형제에게 시험이 되지 않도록 네 자유를 제한하라는 말씀이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은총으로 자유케 되었으나, 자발적으로 자유를 제한하여
스스로 종이 되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처음에 언급한 주제)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와 양보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ㄱ) 술 마시는 문제
술 마셔도 되는가? 술 마시면 죄가 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술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예수님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던가?
저녁 식사 때, 반주(飯酒)를 좀 한다고 죄가 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그런가 하면, 술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잠 23:31)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래서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정말, 술로 말미암은 사고와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음주 운전으로 인한 죽음, 살인 사건, 방탕... 모든 것이 술의 문제이다.
이런 말이 있다. 마귀가 바쁘면 술을 보낸다고 한다.
그런데, 술의 문제도 아디아포라이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술 마셨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다. 절제의 문제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믿음이 약한 형제가 내가 술 마시는 것을 보고 실족케 되고, 시험이 들게 된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사랑으로 내 자유를 제한하여 덕을 세우는 것이 된다.
그렇습니다.
나에게는 자유가 있지만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ㄴ) 우상 제물 먹는 문제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고전 10:18) (우상)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러니까,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 제단에 참예하는 것이니, 먹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내가 어릴 때에 이웃 집에서 제사 지낸 떡과 음식을 우리 집에 가지고 왔는데, 어머니가 다 버리셨다.
그래서 왜 버리느냐고 물었더니, 우상 제물은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위와 같은 믿음과 신앙 교육 차원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이런 말씀도 있다.
(고전 8:4)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딤전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그래서 우상 제물도 믿음과 감사함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을 누가 보고, 시험드는 자가 있다면 먹지 말라는 말이다.
(고전 8: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믿음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나에게는 우상 제물이라도 먹을 수 있는 믿음과 자유가 있지만, 그것이 어떤 형제에게
걸림이 된다면 먹지 않으므로 형제를 배려하고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ㄷ) 주일 지키는 문제 (성수 주일)
주일날 오락해도 되는가? 오락하면 안 되는가?
주일에는 예배드리고 선행해야지 어떻게 오락을 즐길 수 있는가?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주일만 주의 날이 아니고, 1년 365일 전체가 주님의 날이고,
내 인생 전체가 주님을 위해 사는 날들이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도 자유함이 있다.
각자 자기 마음에 확정하고 신앙 양심을 따라 살면 된다.
(롬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ㄹ) 예배 시, 악기(樂器) 사용의 문제
예배 때에 악기, 기타나 드럼을 사용해도 되는가?
옛날에 기타는 술집에서나 사용하는 것이라고 죄악시(罪惡視)해서
교회에서 기타나 드럼 같은 것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이런 악기들을 불경건하다고 해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현대 교회(Contemporary Church)에서는 악기를 사용한다.
시편에서도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라고 하지 않는가?
(시 150:3)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찌어다.
그래서 악기들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이런 것들이 비본질적인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에 해당 되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마음에 확정하는 대로 하면 된다.
상대방에게 정죄하거나 강요할 필요가 없다.
★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전 16:13-14)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믿음은 굳세고 강건하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믿음으로 얻은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섬기라는 말씀이다.
(결 론)
신앙생활에는 본질(本質)적인 것이 있고, 비(非)본질적인 것이 있다.
구원의 문제가 신앙생활에 본질적인 것이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아디아포라(adiaphora, ἀδιάφορα)라고 한다.
이렇게 비본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싸우거나 다툴 필요가 없다.
교회 안에서 별것도 아닌 비본질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 구원에 필수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The peripheral,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 두 개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본질적인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때에 따라서는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주 안에서 자유함이 있다.
그러나, 그 자유함이 형제에게 거리낌과 시험거리가 된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자유를 제한하고 덕을 세워야 한다.
(롬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이 귀한 자유로 형제가 실족되지 않도록 나의 자유를 제한(制限)
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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