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라.
(롬 14:1-6, 갈 3:28, 고전 8:4, 롬 15:7, 엡 4:32)
갈등과 차별이 없는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단체나 집단이나 모임에 갈등과 차별이 있다.
갈등과 차별이 3가지로 존재한다.
1) 인종(人種) (Human Race)
백인과 흑인, 황인종이 함께 더불어 산다.
일반적으로 백인이 강한 자로, 유색인종이 약한 자로 살면서 갈등과 차별을 받는다.
한국 사회에도 한국인이 강한 자로 등급하고, 외국인 노동자가 약자로 산다.
2) 계층(階層) (Class)
계층에는 부자와 빈자가 있다.
부자가 강자이고 가난한 자가 약자이다.
권력자와 권력이 없는 자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와 흙수저 출신들이 있다.
지식층과 배우지 못한 자의 계층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다.
3) 성별(性別) (Gender)
성별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가 신체적으로 강하고, 여자가 약하다.
나이가 들면, 여성이 더 강해지고, 남자가 약해지는 것 같다.
그렇습니다.
이와같이 인종, 계층, 성별로 인하여 갈등과 차별을 낳는다.
본문의 로마서는 로마 교회에 보내 사도 바울의 서신이다.
로마 교회 안에는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교 출신 신자들 두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로 출신이 달랐다.
유대인 신자들은 그 수가 소수였고, 이방인 신자들은 그 수가 많았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렇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 (인종, Human Race) 종이나 자주자 (계층, Class),
남자나 여자 (성별, Gender)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 라고 말씀한다.
그러니까, 차별을 두지 말라는 말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무시하지 말고,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 왜 서로 서로 용납하고 받아 들어야 하는가? (3가지 이유)
1) 하나님이 양쪽 모두를 받아 주셨기 때문이다. (3절)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여기에 음식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씀의 배경은 우상 제물(고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교회 안에 우상 제물에 관한 생각이 달라서 서로 갈등했고, 대립했다.
우상 제물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쪽과 먹으면 안 된다는 구룹이 있었다.
율법의 전통을 갖고 있는 유대교 출신 신자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지만,
부정한 음식은 먹어서 안 되고, 특히 우상에게 받쳤던 우상제물을 먹으면,
우상에게 참여하는 것이 되므로, 우상 제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편의 견해는 달랐다.
모든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이 세상의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딤전 4: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고전 8:4)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그래서 우상은 헛것이고 감사함을 받고 먹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위, 이런 신자들은 믿음이 강한 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먹지 못하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반면에 그 반대편 신자들은 어떻게 우상 제물을 먹느냐? 비판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받아 주셨으니, 먹는 자도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도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2) 그들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절)
인간은 부족하나, 하나님께 그들을 세우는 권능이 있다.
(4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양자가 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데 네가 누군데 왜 판단하느냐?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다는 말이다.
3) 그들 모두의 동기(動機)는 주(主)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6절)
(6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날”을 지키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은 다 같다는 주장이다.
주일만 주의 날이 아니라, 남은 인생 전체가 다 주님을 위한 날이다.
그러나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 초막절, 무교절 같은 절기와 안식일을 중하게 여기며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갈등과 차별이 생겼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우상 제물을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안 먹고,
날을 중히 지키는 자도 주를 위하여 지키고, 날을 안 지키는 자도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니,
차이가 있으나 그들의 동기(動機)는 모두 주를 위하여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니,
서로 서로 비판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 17세기 신학자 멜데니우스 (R. Meldenius)가 했던 말로서 전해오는 명언이 있다.
본질적(本質的)인 것에는 일치를 (in necessaris unitas),
비본질적(非本質的)인 것에는 자유를 (in unnecessaris libertas),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in omnes charitas) 주라.
In essentials, unity ; in non-essentials, liberty ; in all things, charity |
문제는 비본질 때문에 다투는 것이 문제이다.
본질이 아닌 비(非)본질에 목숨을 건다.
피 터지게 싸운 것도 알고 보면, 사소한 비(非)본질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비(非)본질에는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비(非)본질에 일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이 두 가지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인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때에 따라서는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생명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문제 있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제사음식을 먹을 것인가? 먹지 말아야하는 하는가? 하는 것은 아디아포라이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양심의 자유대로 하라는 것이다.
(5절)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신앙 양심)에 (따라서) 확정할찌니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나와 다른 양심을 가진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디아포라에 대한 정말 중요한 것은 형제 사랑의 원리이다.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 자신은 믿음이 강한 자였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고 실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본질이 아닌 비(非)본질에 목숨을 건다.
피 터지게 싸운 것도 알고 보면, 사소한 비(非)본질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비(非)본질에는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비(非)본질에 일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이 두 가지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인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때에 따라서는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장 본질적인 것은 생명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은 문제 있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제사음식을 먹을 것인가? 먹지 말아야하는 하는가? 하는 것은 아디아포라이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양심의 자유대로 하라는 것이다.
(5절)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신앙 양심)에 (따라서) 확정할찌니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나와 다른 양심을 가진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디아포라에 대한 정말 중요한 것은 형제 사랑의 원리이다.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바울 자신은 믿음이 강한 자였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고 실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영원히 우상 제물의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형제를 실족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고전 8:12-13)
이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고, 형제 사랑의 원리이다.
가치관이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 받아 주면, 덕을 세우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된다.
(롬 15: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결 론)
인간 사회나 집단, 모임에는 갈등과 차별이 있다.
갈등과 차별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 존재한다.
인종(人種) (Race), 계층(階層) (Class), 성별(性別) (Gender) 그 외에 등등으로 갈등과 차별이 있다.
그러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고,
화평함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씀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로 세워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종, 계층, 성별등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받아 주며, 품어 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렇게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에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이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고, 형제 사랑의 원리이다.
가치관이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 받아 주면, 덕을 세우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된다.
(롬 15: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결 론)
인간 사회나 집단, 모임에는 갈등과 차별이 있다.
갈등과 차별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 존재한다.
인종(人種) (Race), 계층(階層) (Class), 성별(性別) (Gender) 그 외에 등등으로 갈등과 차별이 있다.
그러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비판하지 말고,
화평함과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씀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로 세워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종, 계층, 성별등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받아 주며, 품어 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렇게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에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