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일 토요일

승리자의 신앙고백 / 창 45:4-8, 50:15-21

       승리자신앙고백 (창 45:4-8, 50:15-21)

(부제 : 하나님생각하면서...)

- 부흥 사경회 말씀 -

승리한다. 이긴다. 이겼다는 말은 매우 기분 좋은 말이다.

승리자에게는 승리에 대한 기쁨이 있다.

한일(韓日)전 축구 경기에서 일본(日本)을 이기니 너무 너무 기뻤다.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여자 탁구 복식에서 신유빈, 전지희 선수가 우승하고,

금메달을 땄을 때도 너무 기뻤다.

이 세상에는 수 많은 시합싸움전쟁이 있다.

그런데 싸움 중의 최고의 싸움죄(罪)와의 싸움이요. 영적인 싸움이다.

또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는 성을 빼앗은 용사보다 낫다. (잠 16: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을 살기가 행복합니까? 아니면 고달픈 세상입니까?

몸의 질병,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의 어려움 등등으로 사는 것이 고달퍼서

남모르게 베개를 적시우며 눈물 흘리는 을 지새우신 분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을 펴 놓고 보십시요.

성경에 누가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람의 이야기는 전부가 고생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이유야 어떻든지 간에 말입니다.)

ㄱ)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아도, 세상적으로 받은 사람은 아니다.

발 붙힐 만큼의 도 없고, 일평생 나그네로 살았다.

고향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면서 평생을 살았다.

마치, 우리 이민 온 교민들처럼, 떠돌이 신세로 다니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히 11:13-16) 땅에서는 외국인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중략)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ㄴ) 모세도 기구할 정도로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애기 때부터 간신히 살아남았고, 바로의 왕궁에서도 행복만은 아니다.

(친부모와 헤어져 살았기에...)

미디안 40년 생활을 하며 처가살이했다.

이스라엘 백성과 40년 동안 광야 생활로 고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적으로 행복하다든가? 안정되었다든가? 한 것은 없다.

성경의 인물들이 다 그렇다. 누구를 막론하고 다 그렇다.

이렇게 볼 때, 그 대표자[욥]같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시편을 묵상해 보십시요.

다윗 왕의 일생도 고난이다.

사도 바울도 인간적으로 얼마나 고생스런 일생이었나요?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요셉이라는 믿음의 사람을 보게 된다

여러분이 아무리 고생했다 해도, 요셉만큼 고생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이런 사람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사람들의 고통을 실감나게 나와 동일시하면서 읽어 보십시요.

얼마나 고달픈 생(生)이었나 말입니다.

그 속에서, 그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볼 수 있다.

ㄱ) 그 사람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대처(對處)해 나갔던가?

ㄴ) 그 속에서 그들은 어떤 은혜를 받으며 살았던가?

ㄷ) 그들이 생각한 은혜는 무엇이며?

ㄹ) 그들이 생각한 은 어떤 인가? 를 물어가면서 성경을 읽어 가노라면,

귀중한 진리를 찾을 수 있고, 현재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아무리 고생하고 억울하다 해도 요셉만큼 억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돈은 딴 사람이 받고, 여러분이 노예로 팔려가지는 않았으니까요.

노예는 기가 막힌 것이다. 한번, 노예평생 노예요.

심지어 자식도, 기술도... 다 주인의 것이다.

한 아버지를 나눈 형들이 착하고 무죄한 동생을 팔아버린 것이다.

이럴 수 있나요? 이렇게 고통스럽고, 억울한 일이 있나요?

또,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하고, 정직하게 살았으나, 보디발의 아내로 인하여,

감옥에 들어가는 억울함을 또 당한다.

그런데, 감옥에서 충성하다가, 하나님의 은혜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때, 흉년이 들어서 형님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온다.

이 때, 찾아온 형들과 나누는 대화가 (창 45:1∼) 이하에 나온다.

요셉은 눈물이 난다. 눈물을 숨겨 가면서 대화한다.

내가 누구인지 아시요? 나는 당신들이 요셉이다.

그 때 형들은 아이쿠! 이젠 죽었구나...

만일, 이 인간들을 데려다가 을 쳐라 해도, 잘못했다고 할 사람 없을 것이다.

아이고, 시원하다. 잘했다. 못된 놈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다.

당신들의 가족과 자손을 내가 기르리이다. 돌보아 주겠나이다.

요셉은 자기를 들을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자기를 팔아버렸던 그들과 화목합니다. 그들을 끌어안고 웁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나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아니다. 인격도 아니다. 수양도 아니다.

요셉의 신앙이다.

인덕(人德)이 높고 인격이 고상해서 그들을 용서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었나? 요셉신앙이다. 요셉의 신앙관, 신관이다.

하나님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보답이다.

을 보면 당장 죽이고 싶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니 미워할 수 없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함으로 승리자가 되었다.

(창 50:15∼) 이하의 내용은 :

형들의 생각에 처음에는 아버지가 살아계셔서 자기들을 살려 준 것이 아니냐?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형들이 요셉에게 말을 전한다.

우리는 다 당신의 입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너희들을 용서하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요셉은 다른 각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고 보고 있다.

요셉의 그 위대한 신앙고백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이 말은 과거 13년 동안 겪은 고난과 아픔을 깊은 신앙적 차원에서 형님들을 대하고 있다.

요셉의 대답을 연구해 보면, 계속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을 보면서 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고,

하나님께 응답하면서 대답하고 있다.

(창 45:5-9) 사이5번이나 [하나님이∼]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당신들을 위하여 ∼

그의 신관, 그의 신앙고백엄청난 용서베풀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면, 그의 신관, 그의 신앙은 어떤 것이었는가?

1)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다.

역사의 주인하나님이심을 믿었다.

이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믿고 있었다.

섭리라는 말은 Providence = Pro (미리)+ vidence (보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생섭리적 안목으로 미리 다 보고 알고 계셨다.

마치 가 높은 상공에서 한 눈에 내려다 보는 조감도(鳥瞰圖)처럼 다 보고 계셨다.

지금은 노예로 팔리워 가고, 억울하게 감옥에도 가지만, 요셉의 일생 아셨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의 일생도 다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바라보고, 신뢰하고 살아가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 마음대로 되고 혹은 누구의 마음대로 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높은 차원에서 볼 때, 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이 깨달음이 있고서야 바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2) 요셉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

을 내리시면 하나님이 내리실 것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할 것이 없다.

조금 억울하다고 심판자 노릇하다가 자기가 더 나쁜 사람이 되구요.

남의 버릇 고쳐 준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악한 사람이 되더라 구요.

(예화) 한 여집사님이 목사님께 찾아와서 부탁을 한다.

다른 집 남편들은 설거지, 시장도 같이 가고 하는데, 제 남편은 경상도 사람입니다.

단, 한번도 부억에 들어가는 법이 없어요.

“목사님, 제 남편에게 충고해서 아내를 좀 도와주라고 해 주세요.”

“아, 그래요, 저 남자와 몇년 살았소?” “25년이요.”

“그러면, 그대로 살다가 마세요.”

그것이 고쳐질 일이 아니다. 배넷병신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참 연애할 때, 앉으라고 하면 앉고, 가라며 가고 그러지...

이제는 매력이 다 없어졌는데 잔소리한다고 들을 남자입니까?

왜 이 말을 하느냐?

내 버릇 못 고치면서 남의 버릇 고칠 생각 마세요.

변수는 내게서 작용한다. 내가 변하면 남편이 변합니다.

나는 부동자세로 있으면서 상대방 고칠 생각 마세요.

이 놈의 세상 바로 잡겠다고 하다가 자기가 더 나쁜 사람이 되더라구요.

사회 정의를 위하여... 그러다가 정의를 무너뜨리고,

자유를 위하여... 외치다가 남의 자유를 짓 밟고,

의(義)를 위하여... 나서다가 질서를 다 깨뜨리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심판하십니다. 심판내 소관 아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입방아 짖지 마세요. 불평하다 보면 내 마음이 더 어두워지고, 듣는 사람도 어두워진다.

불이익이 더 큽니다. 하나님께 맡기세요.

성경은 누누이 가르치고 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

(롬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벧전 2:21) 예수님을 받으시되 대신 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심판하시는 에게 부탁하셨다.

(벧전 3:9) 악으로, 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약 4:12)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사랑권리 밖에 없다.

제발, 어두운 말, 부정적인 말, 흉보는 말을 하지 맙시다.

요셉은 이렇게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창 50:19) 내가 하나님대신하리이까?

형님들이 잘못했지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은 나는 심판자아니다는 말이다.

요셉은 못된 형들을 심판하지 않았다.

내가 심판주가 되는 것처럼, 외람된 일이 어디 있나요?

우리는 사실을 바르게 알 수 없다.

내 문제도 옳게 모르는데, 남의 문제를 바르게 알 수 없다.

(예화) 어느 추운 겨울에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체육 선생님이 교실에서 학생들을 벌 준다고 전부 웃통벗고 나와.

그래서 학생들이 웃통 교복을 벗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문제반장이 너무 가난해서 속 옷이 없어, 교복을 벗으면 맨 살이다.

그러나, 할 수 없이 교복을 벗고 맨몸으로 나왔더니, 체육 선생님이 화를 내면서

니가 나에게 반항한다고 옷을 다 벗고 나와...?

하면서 반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반장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이 반장 학생은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나는 너무 가난해서 속옷이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러분의 판단은 옳은 것입니까?

내가 검다고 말하면 검은 것입니까?

내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입니까?

누가 하나님대신하리요?

그래서 요셉은 못된 형들을 심판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랑권리 밖에 없다.

3) 구원론 중심의 역사를 이해했다. (창 45:5)

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역사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들어 있다.

(창 45:5)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나이다.

(창 50:20) 만민의 생명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매우 중요한 말이다.

팔려(Sold)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다(Sent)는 말이다.

팔려 왔나요? 보냄을 받았나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요셉은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생각하며, 지난 날을 본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생각하며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미리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러한 구원론 중심의 역사 이해를 갖고 있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 같지만, 주님경륜이 있다.

욥이 큰 환난을 겪으나,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생각해 보면, 그 많은 고난과 환난과 억울함은 요셉에게 필요했던 인생 필수 과목이었다.

고난의 훈련 기간졸업해야만 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롬 8:28)

결코, 팔려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보냄받은 것이다.

분명히 팔아 먹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서 온 것이다.

이러한 신앙(信仰)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 45:7)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렇습니다.

노예로 팔려 온 것이 아니다. 특사(特使)미리 보냄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위임장(Mandate)이 있다.

사연이야 어떻든 간에 확실한 위임장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 있다. 여기에 내 존재의미가 있다.

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 이러한 경구(警句)가 있다.

Therefore, Let me say :

I am here (내가 여기 있는 것은)

① By God’s appointment (하나님이 지명하여)

② in His Keeping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③ under His training (하나님의 훈련 아래서)

④ for His time (하나님의를 위하여)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하나님은 나를 오늘까지 인도하셨다고 하는

바른 역사 이해가 있어야 한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얼만 놀라운 신앙고백입니까?

4) 선(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다. (창 50:20)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害)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善)으로 바꾸사

오늘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악(惡) 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을 이용해서 놀라운 선(善)이루시는 하나님의 지혜능력을 알고,

초월적인 역사를 믿고 있었다.

(예화) 사업에 부도난 집사님이 있었다.

부도나니까 냉장고, 선풍기, TV... 전부 다 가져가더라.

그 동안 사업한답시고 교회도 못 나가고, 도 많이 마시고, 가서는 안 될 곳도 가고...

집사라는 이름은 떨어진지 오랬다는 것이다.

조금 더 갔더라면 이 다 망할 뻔 했는데, 이제 은 망했으나, 은 살았습니다고

고백하면서 오히려 감사하더라는 것이다.

그 후에 집에서 쫓겨나, 산 언덕에 닭 몇마리 키우다가 그 자리에 교회 세우고 장로님이 되어 충성하더라는 이야기이다.

때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내 잘못으로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합동하여 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신비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낙심하지 마세요.

★ 요셉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경륜을 믿었다.

그러므로, 형님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용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승리자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승자는 너그럽습니다. 여유가 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돌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본다. 를 보는 동안 천사 얼굴이 된다.

천사마음이 되니, 천사얼굴이 된 것이다.

요셉도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을 생각했다.

요셉의 자기 수양이 아니다. 요셉의 인격이 아니다.

그의 신앙고백이다.

가 파선되어 무인도에 홀로 산다. 짐승만 우글 거린다. 겨울이 온다. 원망이 나온다.

움막 짓고 사는데, 움막이 났다. 본격적으로 원망이 나온다.

깜박 조는데, 큰 배가 오더라.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소?"

"당신이 여기 있는 줄 내가 어떻게 알아? 연기가 나서 와 봤지..."

자기 탔기 때문에 살게 된 것이다.

여러분 !

그렇게 아쉬운 것이 있나요? 애지중지하는 것 있나요?

이것이 끊어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높은 데 있다.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 불행은 없습니다.

다만, 불신앙이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불행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불행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더 불행한 사람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하나님은 실패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연은 없다. 필연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다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프란시스 크로스비 라는 시각 장애인이 있다.

우리 나라 찬송가에 27개가 들어 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등등)

그녀가 어느 날 장님이 되었다. 그 때 이렇게 기도했다.

(Thank you God for made me blind)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하늘 나라만 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길이 막혔습니까? 분명히 열어 놓은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못 찾을 뿐이다. 나를 향한 경륜이 있다.

사도 바울, 내가 왜 로마 감옥에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로마 감옥에 가서 비로소 깨닫는다‘

(빌 1:12) 내가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알기 원하노라

이것은 엄청난 고백이다.

(결 론)

요셉은 매사에 하나님생각했다.

하나님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감동하는 동안

요셉이 형들을 대하듯이 승리자로 살아 갈 수 있다.

David 헛스 보그 “Freedom of forgiveness” 책에서 :

용서해 주는 사람은 즉, 자기가 이미 손해 본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용서는 계속적이기 때문에 동일한 대가(代價)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용서란? 아무 비판도 없이, 아무 불평도 없이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고 했다.

요셉은 형들을 대하면서 울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셉은 내가 받은 은혜감사하고 있으며, 넓게 용서하고 있는데,

들은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 하도 비참해서 “어찌하여 내 사랑의 마음을 이해 못합니까?”

그래서 울었다. 이렇게 높은 차원의 울음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핏처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

용서는 할 수 있으나, 잊을 수 없다는 말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고 했다.

종이를 태워 없애듯이 형체까지 없애야 하고, 기억에서 없애야 한다.

그렇습니다.

용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 안 하는 것이다. 용서하고 싶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용서하지 않는 동안 여러분은 자유인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생각하면서 용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고,

하나님섭리생각하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표어(標語)가 있다.

생각기도처럼

언행말씀처럼

생활예배처럼

이웃주님처럼

사건섭리처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은혜섭리를 바라보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누구든지 용서하고, 수용하며,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요셉이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참 승리용서에 있고, 참 승리사랑에 있다.

용서하는 자가 승자(勝者)이고, 사랑하는 자가 승리자이다.

여기에 승리자기쁨이 있는 것이다.

요셉처럼 하나님생각하고, 하나님주권섭리를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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