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생각하라.
(히 12:1-3, 요 13:2, 롬 8:5-6, 골 3:2, 마 26:53-54, 빌 2:8-11)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코기토 에르고 숨 (라틴어: Cogito, ergo sum)
이 말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불: Le Penseur, 영어: The Thinker)이라는 조각상은
정말 유명하다.
인간이 무엇인가? 할 때,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생각이 그 사람이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생각이 없으면 속물(俗物)에 불과하다.
인간이 뭐냐? 생각이 있어야 인간이다.
생각이 선택하고, 선택함으로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
문제는 생각이 짧고, 생각이 타락되고, 생각이 오염되어서 문제이다.
★ 생각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길잡이가 있다.
(ㄱ) 무엇을 생각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속된 것을 생각하는가? 영적이고 거룩한 것을 생각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ㄴ) 또한,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생각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ㄷ) 생각의 집중력, 생각의 지속성이 중요하다.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면 일관성이 없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ㄹ) 생각의 우선성이 중요하다. 무엇을 먼저 생각하느냐?
생각 자체는 인간 이성에 의한 자기 비판이다.
인격이 바르게 된 사람의 생각은 믿을 수 있다.
믿음직한 사람의 생각은 평안하고, 안심(安心)이 된다.
그러나 인격이 바르게 되지 못한 사람의 생각은 무섭다.
그런 사람이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하면 정말 무섭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 이성의 생각은 무섭다.
그래서 파스칼은 팡세에서 말하기를 “네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다.
즉, 중생한 인간, 성령으로 거듭난 이성, 속 사람의 중생 되어야 생각의 방향이 전환된다.
새로운 이성, 새로운 생각의 세계가 시작된다.
성령으로 거듭난 이성(理性)이 되어야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가 생각된다.
성령으로 변화될 때, 나를 보지 않게 되고, 주님을 보게 된다.
과거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게 된다.
이 세상의 관심에서 하늘나라에 관심을 갖는다.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게 된다.
사탄, 마귀는 먼저 인간의 생각 속에 들어와 역사한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생각을 마귀에게 빼앗기면 마귀의 종이 된다.
그러면 그 마지막은 사망이고 멸망이다.
인류가 타락하게 될 때에도, 사탄, 마귀가 하와에게 접근해서 의심의 생각을 불어넣었다.
의심도 생각이다.
(창 3:1)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렇게 불신앙의 생각을 불어 넣은 것이다.
★ 로마서 8장의 말씀을 반드시 명심(銘心)해야 한다.
(롬 8:5-6)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그러므로,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인생이 되려면 :
하나님을 떠난 육신의 생각을 경계하고, 영의 일을 생각하며,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며(시 1:2)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
생각을 바르게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에 채우고 주장하게 해야 한다.
(요 6:63)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오늘 본문 말씀에 :
(3절)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했다.
고통의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었을까요?
못 박힌 손과 발일까?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리신 옆구리일까? 타는 목마름이었을까?
물론, 그런 육적인 고통도 크고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주님의 가장 큰 고통은 무지한 백성들이 외치는 조롱의 소리 :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39-42)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조롱하는 소리, 비방의 소리를 들을 때,
우리 주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12영 군단의 하늘의 천군 천사를 불러들여 조롱하는 그 인간들과 로마 군인들까지도
다 멸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마 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은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다. 하늘의 천군 천사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십자가를 참으사,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왜냐하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길을
이루어 놓기 위해서, (3절)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답이 있고, 구원이 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할 때 해답이 있고, 구원의 능력이 임하게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도망간 제자들도 원망하지 않고, 로마 군인도 미워하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만 생각했다.
아버지께서 주신 고난의 잔, 그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리하여, 구약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신 것이다.
오직, 말씀의 성취를 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떠한 고난도, 손해도, 슬픔과 억울함도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하나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믿음의 주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 우리 눈의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말이다.
(= fixing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faith)
스데반 집사님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
(행 7:56)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되었다고 했다. (행 6:15)
그러니, 스데반에게는 문제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게 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의 생각과 시선을 항상 주님께 두고 살기 바랍니다.
여기에 해답이 있고, 평안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은 3일 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고,
모든 인간들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하는 구세주(救世主)가 되셨다.
(빌 2:8-11)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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