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하지 말라.
(마 7:1-5, 고전 4:5, 빌 4:5, 엡 4:32, 시 141:5, 벧전 5:6)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절)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누군가를 비판하면, 그 비판이 부메랑처럼 내게로 돌아온다.
너희의 헤아림도 그대로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문제는 인간에게는 분별력이 있는데, 분별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 비판과 분별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1) 동기가 다르다 :
왜 비판하는가? 상대방을 헐뜯기 위해서 한다.
분별은 상대방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한다.
(2) 과정이 다르다.
비판은 조급하지만, 분별은 유보적(留保的)이다.
비판하려면 그 사람의 속을 알아야 하고, 사건의 전모(全貌)를 알아야 한다.
문제는 전모(全貌)도 모르면서, 조급하게 비판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분별하려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안다.
(Suspension of judgment) [비판 유보] 라고 한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물론, “주께서 오시기까지”는 주님의 재림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나 사항(事項)을 주님이 깨닫게 해 주시고,
그 뜻을 밝혀 주시기까지는 내 기준에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때는 분별이고, 상대방을 세우는 결과가 된다.
(3) 기준이 다르다.
비판은 정죄하는 것이다. 정죄는 하나님만 할 수 있다.
정죄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자리에 서는 것이다. (교만이다.)
그리고 비판하는 기준은 자기가 기준이다. 자기 의(義)가 기준이다.
그러나, 분별은 진리가 기준이다.
문제는 자기에게 더 큰 허물이 있는데, 다른 사람의 티를 비판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하셨다.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절)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티는 매우 작은 것이다.
들보는 집을 지을 때, 기둥과 기둥을 가로질러 잇는 대들보가 있다.
얼마나 큰 것인가? 사실상 눈에 넣을 수도 없다. 비교가 안 된다.
주님께서 비교급으로 말씀하신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니, 먼저 들보처럼 너 자신의 더 큰 허물을 볼 줄 알아야 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 그러면, 비판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다] 는 말씀은 :
① 거리적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다는 의미도 있고,
② 시간적으로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주님이 내 곁에서 다 아시고, 혹은 재림하여 오셔서 다 심판하실 것이니,
너희는 비판하지 말고, 인자하게 하며, 하나님처럼 용서하며
너희 관용을 베풀며 살라는 말씀이다.
(엡 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반대로) 누가 나를 비판할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할 때는 이렇게 하라.
(시 141:5) 의인이 나를 칠찌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찌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찌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뒤에서 비방하고, 칠찌라도 그것을 은혜로 여기고,
책망하고, 비판해도 머리의 기름처럼 달게 받아들이고,
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라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이다.
D.L. 무디가 어느 마을에 부흥 집회 인도하러 갔었다.
신문 기자가 찾아와서, 누가 당신을 이렇게, 저렇게 비판한다고 고자질했다.
그 때, 무디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람이 날 잘 몰라서 그렇지, 만일 그 사람이 나를 더 잘 알았다면,
훨씬 더 많이 혹독하게 비판했을 것입니다. 나를 잘 몰라서 그 정도로
날 비판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놀만 빈센트 빌 목사님 이야기도 있다.
그의 저서 (적극적 사고 방식) 책이 세계적으로 2200만부 팔렸다고 한다.
그는 미국 사업가들에게 마켙시장 언어로 복음을 전한다고 비판을 받았다.
기독교와 그가 속한 감리교에서도 비판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가 95세까지 장수하셨다.
그랬더니 신문기자가 찾아와서 목사님을 비난하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은 outlive 하셨네요.
[이 말은] : outlive (a person) : (남보다) 오래 산다는 말이다.
그랬더니, 빈센트 빌 목사님이 "아니, outlive 이라니요? outlove 해야지요." 라고 대답했다.
outlove (To love more than somebody else)
남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기간(Duration) 보다,
얼마나 기증(Donation)하며 섬기며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비판하지 말고, 반대로 비판받을 때는 시편의 기자처럼,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달게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나를 오해하고, 곡해해서 비판하든지, 실제로 허물이 있어서 비판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로 피해서 살라. 때가 되면 높여 주신다고 하셨다.
(벧전 5: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결 론)
비판하면, 그 비판이 내게로 돌아오니,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비판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분별은 할 수 있다.
(그래야 이단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문제는 비판과 분별은 그 동기와 과정과 기준이 다르다.
비판 대신에,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의 용서하심같이 용서하고(엡 4:32)
관용(寬容)을 베풀며 살라. (빌 4:5)
반대로, 내가 비판을 받을 때는 :
(시편 141:5)의 다윗처럼, 나를 칠찌라도 은혜와 머리의 기름처럼 받아들이고, 기도하며,
무디 선생처럼 그가 아는 것보다 “나는 더 큰 죄인”인 것을 기억하며 수용하고,
빈센트 빌목사님처럼 더 많이 Outlove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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