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는 뜻이 있다.
(시 119:67, 71, 히 2:6-9, 신 8:2, 시 42:5, 잠 24:16, 시 105:17-19)
사람은 누구든지 고난받는 것은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에 예기치 않게 크고 작은 고난이 찾아온다.
행복이 상대적이듯이 고난과 슬픔도 상대적이다.
그래서 누가 어떤 고난을 당할 때, 뭐 그까지 것 가지고 그러느냐?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당하는 본인 당사자에게는 정말 괴롭기 때문이다.
고난의 문제가 물질의 궁핍이든지? 질병의 문제이든지? 인간관계의 불화 때문이든지?
그 고난으로 인하여 괴로움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하나님은 사랑도 많으시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이신데,
왜 고난을 면제해 주지 않으시고,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다.
고난을 당할 때, 그 뜻을 모르면 정말 그 고난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난에는 뜻이 있다.]
그 뜻을 알아야 고난을 참고, 이겨낼 수 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
1) 우리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만 의뢰 하게 하기 위해서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우리 인생이 평탄한 꽃길만 있는 것이 아니고, 광야와 같은 험한 길을 갈 때도 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가?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낮추게 되고, 겸손을 배우게 된다.
사람이 순풍에 돛 단듯이 평탄하고, 출세하고, 성공만 하면, 성공에 만취되어서 자신이 잘 나서
그렇게 된 줄 알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모를 수 있다.
강한 햇빛이 내려 조이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 서 있으면, 열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열 안 받아야지 아무리 결심해도 태양 아래 서 있으면, 열을 안 받을 수 없다.
모든 일이 형통하고, 순항 하고, 마음먹은 대로 다 잘 되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자신이 어떤 특별한 Somebody인 줄로 착각한다. 인간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마치, 고무풍선을 물 속에 아무리 집어 넣어도 다시 솟구쳐 올라오듯이,
인간의 교만은 저절로 자꾸, 자꾸 올라온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결심을 해도 인간은 교만해 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서, 고난이 필요한 것이다. 고난을 통해서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해 진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나를 낮추시고, 겸손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겸손하여져서 하나님만 의뢰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이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정도로
고난을 받은 것은 자기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고난에는 뜻이 있는데, 고난을 통해서 마음을 낮추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
2) 말씀을 배우고, 순종케 하기 위해서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말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 말씀에 역설적 의미가 있다.
고난은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고난이 유익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 성공하면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잊어 버린다.
잘 나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
3) 죄와 결별하고 말씀과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해서
(시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하기 전까지는 세상이 좋아 보이고, 쾌락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하면서 그게 아니었구나, 내가 속아 살았구나 깨닫는다.
그래서 죄를 철저히 끊어 버리고, 말씀과 더불어 살게 만드는 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이다.
세상 쾌락에 취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게 되면 희망이 없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우리가 고난을 당해서 낙심하게 될 때, (시 42:5) 말씀을 암송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나의 힘이 되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어떻게 재기 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이 나의 힘이고, 생명이고, 용기이고, 소망이 된다.
♬ (복음송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힘이시며, 방패이시라
말씀은 7전 8기의 힘을 주신다.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구약의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다.
종으로 팔리고, 억울하게 감옥에도 들어가서, 쇠사슬에 매였었다.
(시 105:17-19)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이것이 요셉이 받은 고난의 뜻이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말씀을 다시 부여잡고, 말씀과 더불어 살면서 말씀이 응할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결 론)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고난 속에는 뜻이 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을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는 말씀들이 있다.
고난 다음에는 → 영광이 있고,
순종하면 → 축복이 오고,
십자가 후에는 → 부활의 영광이 있고,
가시관을 쓰면 →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연단 후에 정금 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 오늘 말씀을 마치기 전에 꼭 우리가 믿고, 붙들어야 할 귀한 말씀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지금 당하는 어떤 고난이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줄 믿으시고, 인내하며,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마다 고난의 모양과 형태가 다르다.
지금 여러분이 어떤 고난 가운데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에는 뜻이 있다.
1) 고난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낮추시며 겸손히 하나님만 의뢰하게 한다.
2) 고난을 통해서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말씀에 순종하게 만든다.
3) 고난을 통해서 죄를 끊어버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더불어 살게 하신다.
그리하여, 비록 지금, 고난 중에 계신 분이 있으시더라고, 말씀이 응할 때까지 단련받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새롭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변화받아
의의 길, 평강의 길, 생명의 길로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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