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힘써 알자. (호 6:1-6)
신학자 [폴 틸릭히] 말하기를 :
인간은 어쩔 수 없이 4가지 범주 (시간, 공간, 인과율, 실체) 한계
안에서 산다고 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시간의 한계를 말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살 수 없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늙게 되어 있고, 병들고, 죽게 되어 있다.
역사 이래 이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산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자기 나이를 바로 알고 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실제로 자기 나이를 바로 알고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남은 생(生)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제대로 알고 사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남은 생(生)이 많이 남은 줄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신의 남은 생을 생각하고,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사는 자가 지혜자이다.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뜻으로 교육학적으로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많다.
한때, 유럽의 황제였던 그가 1815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정배 생활을
하다가 6년만에 죽었다.
내게 주어진 한계를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 한다고 나도 하고, 남이 가졌다고 나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한계가 있고, 유한성이 있고, 나에게 주어진 영역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定)해 주신 것이다.
10년, 20년, 30년 후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 안에서 변화된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사는 인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멋있게 늙어 가고 싶으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우리는 정말 알아야 할 것은 모르고, 몰라도 되는 것은 많이 알고 있다.
옛말에 나이가 50세가 넘었거든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했다.
헛된 꿈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말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 봐야 성공할 수 없다.
흑인 목사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한 말 중에 :
“당신의 장례식에서 조사할 때 무슨 말을 할 찌를 생각해 보라” 고 했다.
나의 한계를 알고, 나의 본래성을 알고, 나를 바로 알고 살아야 한다.
문제는 나를 바로 알려면,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를 알 수 없다. (요한 칼빈)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얼마동안 살게 하다가,
정한 때에 나를 불러 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면 나를 알 수 없다.
★ 이 세상에는 [3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다.
1) 하나님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사는 인간
이런 인간을 방임된 인간, 자신을 버린 인간, 되는대로 사는 인간,
케세라세라(될 때로 되라)의 인간이다.
내가 누구인지도, 미래도, 회개도, 성경도, 구원도 관심이 없다.
2) 하나님을 찾아다니는 인간이다.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다.
계속 찾지만,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을 철학적 인간, 종교적 인간이라고 한다.
3)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인간이 있다.
이런 사람은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 말은 회개를 의미한다. 그러면 무엇이 회개인가?
세상으로 향하던 나의 마음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즉,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눅 15장) 어느 날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모든 것을 다 허비한 후에 가슴을 치며 후회한다.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한다.
나는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한 불효자다고 아무리 울어도 회개는 아니다.
그가 돌이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위가 회개다.
회개를 오해하지 말라.
죄를 지었다. 눈물로 회개 기도했다. 철야하며 회개한다.
가슴치며, 후회(後悔)해도 회개가 된 것이 아니다.
그 동안 행하던 죄악의 습관을 Stop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회개가 성립된 것이다.
각서를 써도 소용없다.
돌아서는 행동이 있어야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다.
정말, 회개했는지 아는 것은 다시, 그 죄악에 구렁텅이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치,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처럼 (벧후 2:22) 알면서도 또 다시 같은 죄를 짓는다면
회개한 것이 아니다.
신앙은 행동이다. 사상이나 감상이 아니다.
신앙은 있으나 행동이 없으면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사상이다.
신앙은 우리의 변화된 행동이나 삶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7절)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
신앙생활에서 입만 가지고 행동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선교합시다. 땅 끝까지 복음 전합시다. 구제합시다. 아무리 외쳐도,
헌금도 안하고, 헌신도 없으면, 그런 신앙은 죽은 것이라는 말이다.
(22절)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느니라.
오늘 본문에 여호와를 힘써 알자고 했다.
여기서 알자는 말은 [야다] 라는 말인데,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남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봉사하고 섬기고 순종해서 봄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체험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볼 수는 없으나 체험적으로 알 수 있는 분이시다고 했다.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그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이런 찬송 가사는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체험적인 신앙고백적 가사이다.
중세기 신학자 [안셈]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했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가운데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찢으셨으나, 도로 싸매실 것이요” (6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마음을 갈기갈기 찢으실 때도 있다.
하나님의 진노로 때리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 진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채찍 안에 생명의 말씀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놀라운 은혜가 있다.
부모가 자식을 채찍질한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고, 부모의 사랑이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잠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니라.
치유의 손길이다. 내가 할 일은 회개이다. 회개만 하면 된다.
부모는 종아리를 때렸지만, 잠든 아들의 다리를 어루만져 주며, 우신다.
“이 자식아, 얼마나 아펐느냐? 많이 아펐지?”
때린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프다.
매를 들기만 하여도 벌벌 떠는 아이가 있고,
아무리 때려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 아이가 있다.
그러면 부모가 지쳐 버린다.
그리고는 “야, 제발 잘못했다고 말 좀 해 다오!”
(사 1: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패역하느냐?
이 말씀은 온 몸이 매 맞은 흔적이거늘 왜 회개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지쳐서 하시는 말씀이다.
돌이켜, 회개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치유가 임한다.
지금은 우리가 정보 홍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점점 줄어가고 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유명한 과학자, [아이작 뉴톤]은 노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기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자녀도, 제자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답답해서 제자 하나가 물었다.
“그러면 선생님은 뭘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가 나의 주님이신 것, 그것 하나는 아네”
(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기에 치유의 역사가 있고,
(3절)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에 은혜가 있고,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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