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5일 월요일

그리스도인의 실천 윤리 / 약 2:17, 사 44:22, 마 5:48, 시 119:60, 롬 8:13-14, 눅 6:36, 딤후 1:13-14

 그리스도인의 실천 윤리

(약 2:17, 사 44:22, 마 5:48, 시 119:60, 롬 8:13-14, 눅 6:36, 딤후 1:13-14)

윤리(倫理, Ethic)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거나 지켜야도리(道理)를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다.

그런면에서 산상수훈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신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행하고 지켜야 할 윤리를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천 윤리는 무엇인가?

1) 신속한 실천 윤리

신속한 실행(實行)실천(實踐)이 있어야 한다.

(약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기독교의 윤리지금, 이 시간, 내 곁에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신속히 도와주는 것이다.

인류 사랑을 말하면서 곁에 있는 이웃이나 배우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모순이다.

아프리카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이웃 사랑을 못 하는 것이 문제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있다. (눅 10:30-37)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다.

그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또 이와같이 한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기름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아 주겠다”고 하며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다.

제사장도 그냥 갔고, 성전 봉사자, 레위인도 그냥 피하여 갔으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즉시로 도와주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윤라실천 윤리이다.

기독교 윤리로만, 으로만 사랑을 외치는 종교가 아니다.

(요한1서 3:18) 우리가 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진실함으로 하자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윤리는 신속 윤리이고, 긴급 윤리이다. 즉각적이다.

[나중에 도와주리라]가 아니다.

지금, 이 시간이다. Here and Now 이다.

(잠 3:27-28) 네 손이 을 베풀 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사랑의 실천즉각 해야 하고, 미루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즉시해야 한다.

특별히, 회개는 미루지 말고, 즉각적으로 해야 한다.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이 말씀은 나중에 돌이키라는 말씀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 돌이키라는 말씀이다.

(슥 1:3)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가 생각나고, 죄책감이 나를 괴롭히면 즉각적으로 주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해야 한다. 이것이 사는 길이고, 평안을 얻는 길이다.

요셉은 먼 이국(異國) 땅으로 팔려와서 종살이하였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아주 잘 해 주고, 친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인이 성적으로 유혹하였다.

그 때, 요셉은 이렇게 대답했다.

(창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요셉은 즉각적으로 돌이켜 도망쳐 나왔다. 참 잘한 것이다.

(딤후 2:22)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였다.

유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라,

청년의 정욕은 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다.

(시 119:59-60)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계명 지키는 것을 신속히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겔 33:11)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회개죽음을 가르는 것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돌이켜야 한다.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러므로, 사랑실천도 미루지 말고, 신속히 하고,

회개신속히 하고, 말씀 순종즉각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이고 실천 윤리이다.

2) 온전 윤리

(마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인간이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이 가능한가?

이 말씀은 하나님처럼 능력 면에서 온전하고, 전지전능하라는 말이 아니고,

인격적인 면에서 온전하라는 말이다.

똑같은 산상수훈의 말씀이 누가복음 6장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그러니까, 자비, 사랑, 긍휼베푸는 삶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온전하라는 말이다.

성경 어디에도 네 원수미워하라는 말이 없다.

그런데, 바리새인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마 5:43)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예수님은 (44절) 너희 원수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정말, 인간이 원수사랑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원수사랑하라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실천하셨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이는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눅 23:34) 아버지여 저희를 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스데반집사님도 에 맞아 순교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행 7:60) 주여,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의 한 분은 손양원목사님이시다.

손양원목사님의 호는 산돌이다.

그는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자들을 돌보던 중, 1948년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인 안재선이라는 사람이 그의 장남과 차남 동인동신친미,

예수쟁이라는 이유로 총살로 죽였다. 순교 당한 것이다.

손양원 목사아들을 죽인 공산당원 안재선이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는 것을 알고,

안재선을 용서해 줄 것을 요구하며 또 구타를 금하게 하고 그 사람을 자신의 아들을

삼겠다고 하며, 구명 활동을 하여 결국 양아들로 입적하여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딸, 손동희는 미쳐 버릴 정도였다.

그 후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며 목회를 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났지만 피난 가지 않고 나병환자를 돌보다가, 공산군에 체포

되고(1950. 9. 13.) 15일간 여수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공산군이 퇴각할 때 공산군은 손양원 목사를 여수밑 미평의

과수원으로 끌고가서 총살함으로 향년 49세순교하셨다.(1950. 9. 29.)

그는 정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말씀실천한 목사님이시다.

그를 기리는 기독교 영화 [사랑의 원자탄]이 상영되기도 했다.

애양원에서 나병환자를 사랑으로 돌보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

사랑으로 품고, 양자를 만들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실천

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마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랑, 긍휼, 자비에 있어서 하나님처럼 온전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천 윤리이다.

3) 성령님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인간 안에는 죄성(罪性)이 있다. 이 죄성은 곧, 사망성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기주의자이다. 자기 중심적이다.

예수 믿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완전 성화가 되지 못해서

이러한 죄성이기심이 언제 드러나고,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신속 윤리, 온전 윤리를 실천하기가 정말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딤후 1:13-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만 지킬 수 있는 윤리이다.

비행기가 (이착륙을 제외하고) 날아갈 때는 구름 위로 날아간다.

그러면, 아무리 폭우가 내려도 비를 맞지 않는다.

이와같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죄성사망성을 이길 수 있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율법 아래서 정죄감, 죄책감, 자책감이 나를 괴롭힐 때,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신앙생활말씀성령으로 사는 이다.

(결 론)

기독교 신앙이 교리(敎理)(Doctrine)로 끝나면, 소용이 없다.

실행(實行)하고 실천(實踐)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 서신이 전반부교리이고, 후반부실천편, 생활편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실천 윤리는 무엇인가?

1) 신속한 실천 윤리이다.

2)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

이 말은 능력이 아니라, 자비, 긍휼, 사랑에 있어서 온전하라는 말이다.

3) 문제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실천하라.

성령의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긍휼사랑실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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