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이사야 53: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한 주간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드리며 은혜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극심한 고난의 죽음.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
예수님이 죄인들인, 우리를 위하여받으신 고난은 시시한 고난이 아니다.
작은 고난도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최대로 극심한 고난었다.
본문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표현들을 보면 :
질고, 간고, 징벌, 고난, 찔림, 상함, 징계라는 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단어들은 모두 극심한 고난을 의미하는 단어들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당하신 고난이다.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고난보다도 큰 고난이다.
그래서 아주 극악한 범죄자들, 강도, 국가 반역자들에게 이 십자가의 사형을 받게 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죽으셨다.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셔야 했을까요?
유대인은 어떤 악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율법에 의해서 신명기 25:3)
40대 이상은 때리지 못 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이 매를 맞을 때에도 꼭 40에 하나 감한 매, 즉 39대씩만 쳤습니다.(고후 11:24)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채찍으로 칠 때에 수도세지 않고 무자비하고 가혹하게 쳤습니다.
더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였을 때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러면서 정치가라 군중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내어 주었다.
의인이 죄수가 되었다. 성자가 죄인이 되었다.
강도짓 한번 하지 않으시고, 강도와 함께 죽으셨다.
돈 한 푼도 없으신 분이 부자의 묘에 누우셨습니다.
최대의 의인이 최고의 악인 취급을 받으시면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2. 대속(代贖)의 죽음
예수님은 자신의 죄나 허물 때문에 당하는 죽음이 아니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한,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었다.
(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 )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 )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 )이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 )이 나음을 입었도다.
* ( )안에 자기 이름을 넣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허물과 죄 때문이었다.
시원한 나무 밑에서 한 성인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선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도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배고픈 귀신인 아귀에게 쫓기던 비둘기 한 마리가 그의 품안으로 도망쳐 들어 왔다.
성인은 그 비둘기를 품에 감싸고 내놓지 않았다.
아귀가 말한다. “여보시오. 그 비둘기는 내 밥이니 내어 주시요”
“나는 내 품으로 들어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비둘기를 너에게 내어 줄 수가 없소”
“난 배가 고파 죽겠으니 어서 내주시오. 나는 배가 고파서 미치겠소”
“나는 이 가련한 비둘기의 생명을 내팽개칠 수 없소.
차라리 비둘기 무게만큼 내 살을 베어 주겠소”
성인은 양쪽에서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을 가지고 와서 한쪽에 비둘기를 올려놓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다.
성인은 자신의 살점을 더 베어서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비둘기 쪽으로 저울이 기울었다.
성인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저울 위에 올려놓았다.
그제서야 비로소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다.
그 때 갑자기 아귀는 자취를 감추었다.
비둘기 대신에 성인이 자신의 살점을 잘랐으나, 그것도 모자라 자기 자신을 다 내어 주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고난을 당하시고 그의 몸을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3. 자원적인 죽음
예수님은 어쩔 수 없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초하신 것이다.
자원해서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받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떤 이단은 마치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은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마 26:53-54)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군단)이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이 있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고난을 자초(自招)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원하여 찔리셨고, 자청하여 가시 면류관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고,
손과 발에 대못이 박혔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고, 피 흘려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 왜 주님이 그렇게 하셨던가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고난이고, 죽음이었다.
이것을 주님의 대속적 죽음이라고 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가시관을 씌우니 가시가 머리와 이마를 찔려, 피가 터졌다.
채찍으로 매를 맞아 온몸이 터지고, 살점이 뜯겨졌습니다.
그가 상함은 바로 나의 죄악을 때문이다.
여기 본문, [죄악]의 원어는 원죄이다.
나의 원죄와 자범죄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셨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죄 많은 인간들에게 징계를 받았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가 채찍에 맞으셨다.
이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자원한 고난이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약 3시간 동안 채찍에 맞으시며 고난을 받으셨고
약 9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서 피가 땅에 떨어졌다.
이는 우리 죄악을 담당하기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었고,
또한 우리의 질고를 지고 병을 고쳐 주시려는 고난이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자원, 자청, 자초하셨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학자 켐벨 몰간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다” 라고 말했다.
신학자 델리취는 “이사야 53장은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이다” 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편한 것을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고난을 자초하셨다.
사람들은 받기를 좋아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내어 주셨다.
사람들은 높아지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을 낮아지셨다.
사람들은 대접받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친히 섬기셨다.
사람들은 소유하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모두 내려놓으셨다.
(결 론)
19세기 미국의 교육자 [호라스만]이라는 분이 엄청난 재산을 들여서
소년 감화원을 짓는 개원식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다.
”단 한 사람이라도 여기서 감화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다면
이 건물을 세우는 데 든 예산과 인력은 조금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개원식이 끝나고 한 신사가 [호라스만] 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한 말은 너무 과장된 말이 아닙니까?“
이 때 [호라스만]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지나치다니요? 만일 그 아이가 당신 아들이라도 그렇게 생각됩니까?“
그렇습니다.
한 영혼을 구원한다면 수십억원도 아깝지 않습니다.
한 젊은이가 예리한 칼을 들고 동네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서 외쳤다.
”나는 5분 이내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 해 보일 수 있다.“
그는 칼을 하늘을 향하여 휘두르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5분 이내 이 칼로 나를 죽여 보시오.
당신께 도전하는 이 나쁜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분이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당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여 보시요”
그리고 5분을 세기 시작합니다.
1분, 2분.....5분이 지났습니다.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큰 소리로 선언하였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쟁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나 같이 악한 인간을 벌할 수 없다면 그는 신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을 심판할 줄도 모르는 신이라면 혹시 있다 할 찌라도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게는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칼을 휘둘러 대는 그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못하였다.
그 때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그 젊은이 앞으로 다가갔다.
모두 긴장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주시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에게 다가가더니 휘두르는 칼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젊은이는 자기 아들을 가르켰다.
할머니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에게 칼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이 잘못 할 때 이 칼을 들고 와서 5분 안에, 죽여 달라면 죽이겠습니까?“
젊은이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요? 할머니!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들을 어떻게 죽일 수 있어요?“
그 때에 할머니가 젊은이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은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인, 어떤 악한 사람이라도 벌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 같은 악한 사람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참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 영광 버리시고, 성육신하여 오셨고,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받으셨습니다.
나는 공로 없지만, 예수님만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영생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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