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관 (4)
★ 기독교 역사관의 특징 (3)
첫 시간에는 기독교 역사관 [서론]을 공부하였고,
그 다음에는 [기독교 역사관의 특징] 을 4가지 중에서 2가지를 말씀드렸다.
1) 첫째는 : 기독교는 역사성을 강조한다는 것이고,
2) 둘째는 : 기독교는 성육신 사건을 역사의 중심점(中心點)으로 본다.
(앞의 강의들을 복습하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 기독교 역사관의 세 번째 특징을 말씀드린다.
3) 셋째는 : 기독교 역사관은 인간의 역사 과정을 하나님의 인간 회복의 계획이
실현되어 가는 그 현장, 무대로 본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의 역사 과정을 무의미한 과정으로 보지만,
기독교 역사관은 그렇게 보지 않고,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 발전 과정을
하나님의 인간 회복의 계획이 실현되어 가는 마당이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가는 현장으로 본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창세 전에 계획되고,
다 결정되었지만, 바로 그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에 아주 적극적인 의미가 부여하게 된다.
일반 역사의 모든 사건들과 이방 나라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 그것들까지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간접적인 관계를 갖는 것으로 본다.
우선, 이 역사의 마당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니까, 이 역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방 나라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관계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준비 또는 방편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관은 가르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앗수르를 들어 징계의 방망이로 사용하시고, 유대민족을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여,
유대인을 단련시키는 도구로 바벨론 나라를 사용하셨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는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다스리시고,
왼손으로는 세상 나라를 다스리신다고 했다.
적극적인 의미로 이 역사의 마당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때,
우리의 삶은 아주 신이 나고, 하나님을 위해 목숨 받쳐 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세상의 정부나 사회도 다 하나님의 왼손에 쥐고 계신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볼 때,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준비와 방편이 된다.
그러니까, 역사를 보는 태도가 부정적이 아니고 긍정적이 되고,
소극적이 아니라, 적극적이 된다.
오스카 쿨만은 지적하기를 그리스도 사건은 일반 역사의 사건들을 심판하는
최종적 심판의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 되어 가는 것은 세계 역사에도 영향을 미친다.
쿨만은 좀 더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했는데, 이방 나라도 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고 있으며, 세계 역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건과 일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강조했다.
오늘 셋째로 말씀드리는 바는 역사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인가? (3가지로 정리하면)
(1)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마당이다.
(2) 일반 역사나, 이방 나라의 흥망성쇠도 간접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 관련이 있다.
(3) 그리스도의 사건이 일반 역사를 심판하는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영향을 주고 있다.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와 일반 역사]를 연필에 비유했다.
연필은 그 가운데 뻗어 있는 가느다란 연필심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원주 나무가 있다
원주 나무는 일반 역사이고, 그 연필심은 (Christ line) 그리스도 선이라고 비유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더불어 그 이전의 예언자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사건들,
그리고, 주님의 12사도들과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같은 인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그 모든 사건들을 연결 해 놓은 가운데 중심선이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 선 (Christ line)인데, 이것이 다른 모든 역사를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는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에 일반역사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일반 역사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무의미하게 여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역사를 하나님과 관련이 없다고 보지만, 기독교 역사관은 철두철미
역사의 의미를 하나님의 구속 섭리와 연결하여 해석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역사 과정을 하나님의 인간 회복 계획이 실현되어 가는 그 무대로
본다는 것이다.
★ 역사에 대한 태도가 몇 가지로 나타난다.
우선, 예언자적 비관론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입장이고, 라인홀드 니버의 입장이다. 주류 기독교 사상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비록 여기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역사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비관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현장을 보고, 이 사회의 구조와 인간의 죄성(罪性)을 바라볼 때,
그리고 그 죄의 무서운 것을 깨달을 때 비관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본성에 깊이 자리 잡은 그 죄악의 실체와 세력을 보는 사람은 그렇게 비관론자가 된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누구보다도 더 심각하게 보았다.
세속 질서 가운데서 만들어진 모든 사회, 정치 구조 속에 깊이 스며든 그 죄악의 세력을
보는 사람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그 죄악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눅 18:8)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아침이 가까워 오면, 새벽은 더 깜깜해지듯이,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더 악해지는 것을 볼 때, 비관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과 더불어 내적 평안을 누리고 사는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지상에서는 평화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계속 죄와 싸우고 있으며, 육신의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역사를 바라볼 때, 끊임없는 투쟁이요, 끊임없는 긴장으로 보았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롬 7:19-25)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와같이 사도 바울이 자신 영혼의 내적 갈등을 고백한 것처럼, 어거스틴도 인간의 역사는
두 도성의 끊임없는 투쟁이고, 끊임없는 갈등과 끊임없는 긴장으로 보았다.
하나님 나라와 마귀의 도성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조금 소극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그의 구속 사관의 관점에서
현세의 역사 자체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했다.
인간의 역사는 목적 자체라기 보다는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
현세의 역사를 하나의 수단으로 보면 비관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어거스틴은 현세에서 완전한 행복을 기대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는 현세(現世)의 삶은 가련하고 비참한 생활이라고 묘사했다.
그가 비관론적으로 말한 표현을 몇 가지 인용하면 :
“내가 결혼할 때에 나는 비참한 것을 보는구나.
아이들이 태어날 때 근심걸이가 늘어나는 것 뿐이구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이렇게 비관론적으로 말했다.
이 세상에는 고난, 비참, 증오, 거짓,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나, 죄성(罪性)을 갖고 산다.
그래서 인간은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거짓말을 한다.
또한, 시기, 질투, 음란, 탐심 같은 것은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죄된 성향의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사과 나무이기 때문에 사과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성이 있어서 자범죄를 짓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웃으면서 태어나지 않고, 울면서 태어난다는 사실은
그가 당면할 재난들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예시해 주는 것이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부정적이고 어둡고 우울한 실재론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염세주의 입장도 아니고, 불교적인 부정주의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종말론적 신앙 의식을 갖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바라보면서 인간 안에 깊이 스며든
죄악의 무서운 파괴력을 절실히 느끼는 자의 한탄이요 탄식이다.
이것이 염세주의나 불교적 부정주의와 다른 점이다.
천국의 기쁨을 바라보면서 현세에서 누리는 그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는 종말론적 신앙 입장에서 말하는 실재론이라고 한다.
실재론은 우리가 이렇게 비관론자로 될 수 밖에 없는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낙관론자들이다.
★ 그 근거가 어디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라는 말을 한다.
어거스틴의 글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라는 말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비록, 이 현세의 역사가 영원하지 않고, 잠정적이고, 수단이며, 목적 자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 잠시적인 역사의 발전이 그냥 되는대로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서 발전되고 있다는 점에서
낙관론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아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서 발전해 가고 있다.
이것을 알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종말론적이고, 발전적인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때,
사도 바울도, 어거스틴도 비관론적 낙관론자가 되었고, 칼빈도 낙관론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의 사건이 역사 발전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때,
기쁨과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될 종말론적 완성점을 바라보게 될 때,
이 종말론은 우리에게 놀라운 힘을 주고, 기쁨도 주고, 의미도 준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궁극적으로 완성될 종말론을 굳게 붙잡고 살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탄식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 7:24)
또한, 이 세상의 정치, 사회 구조를 바라면 탄식한다.
그러나,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궁극적으로 완성 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말씀과 성령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은
바울처럼 로마 감옥에 갇혀도 감사하고 기쁘고 용기가 생긴다.
우리가 볼 때, 이 세상은 모순덩어리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 모든 분야 구석 구석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그 섭리를 바라볼 때, 비관론이 변하여 낙관론 자가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이 나타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내가 처음과 나중이고, 로마 황제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다스리고 있다.
역사의 파노라마와 역사의 모든 것은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이 깨달았을 때, 그는 절망하지 않고, 낙관론자가 된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는 죄수가 되었을지라도,
눈을 들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서 모든 역사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해서
진행되어 가고 있음을 알 때, 낙관론자가 된다.
주님 섭리의 손을 바라보는 사람,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라도 그것이 문제 되지 않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용기를 갖게 된다.
세상과 인간을 보면 비관론자가 되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종말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생각할 때, 낙관론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태도는 비관론인 동시에 낙관론이다.
즉, 비관론적 낙관론이다.
★ 끝으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궁극적인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 주변에서 목격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결론적인 의미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 재난이 일어나면,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어떤 나라에 부가 점점 축적되고 부요해지면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렇게 함부로 판단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면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등등...
이렇게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에 당하는 모든 사건을 종말론적인 의미로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고 보류해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건에 종말적인 의미가 현재는 가리워져 있고,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일반 역사에도 관여하시고, 결국,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지만, 그것 하나 하나를 다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는 무엇을 자꾸 판단하려는 의욕이 있다. 이것이 문제다.
모든 사건을 내가 하나님처럼 판단하려는 그런 태도는 기독교적 역사관이 아니다.
이런 것은 무당적인 역사관이고, 점치는 역사관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판단하는 것을 금하셨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 손에 달렸다”
모든 판단은 종말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역사적 사건의 모호성(模糊性, ambiguity)은 그대로 인정해 두어야 한다.
그것이 밝혀지고, 알려질 때가 있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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