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암담할 때
(롬 4:19-22, 히 12:6, 욥 23:10, 계 11:15, 사 41:10, 출 23:25)
우리는 암담(暗澹)하고 어려운 세상을 현재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고, 사실, Fact가 그렇다.
그런데, 현실이 있고, 사실이 있고, 진실도 있다.
현실(現實) reality, 사실(事實) fact, 진실(眞實) truth 은 어떻게 다른가?
1) 현실(現實) reality = 현재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과 감정이다.
2) 사실(事實) fact = 실제로 일어난 사안(事案)이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일을 말하는데,
현실이 주관적인 것에 비하여, 사실은 객관적이다.
3) 진실(眞實) truth = 사실과 진실은 같은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속 사정이 있다.
그래서 당사자의 진술과 사건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고 나서야,
비로소 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이나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데
그것이 진실(眞實)이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밖으로 드러난 현실이나 사실이 전부 아니다.
그 이면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실보다 진실이 더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을 매질한다. 자식을 때리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자식의 잘못을 고쳐 주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이것이 채찍질의 진실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진실을 모르면 부모를 욕하고, 나쁜 아버지가 된다.
(잠 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을 허락하신다.
그것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서 연단시키려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진실한 마음을 모르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된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받치라고 하셨다. (창 22장)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큰 시험이었다.
그러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받치라는 것이 본심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고, 진심이었다.
이러한 본심이 하나님의 진실이다.
같은 살인 사건이라도 1급 살인 형량이 있고, 2급 형량이 있다.
1급 살인 형량은 의도적 살인, 계획성이 있을 때는 그 형량이 큰 것이고.
2급 살인 형량은 우발적인 경우이다.
이것은 사람을 죽일 마음이 없이 일어난 사건이다.
여기에 사건의 사실과 사건 이면에 있는 진실의 차이가 있다.
구약 성경에도 나무하러 산에 갔는데, 우발적 사고로 도끼날이 빠져 나가서
옆의 사람이 죽게 된 경우에는 그 가해자를 도피성으로 보내어 피신하게 하라.
그러나, 의도성을 갖고 고의적으로 계획해서 살인한 자는 그 피 값을 받게 하라.
그러니까, 의도적이냐? 아니냐? 가 중요하다.
여기에 사실과 진실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사람마다 갖는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암담하게 느끼며, 절망적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지금은 어렵지만, 현실과 사실 넘어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며,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다. 아브라함이 그랬다는 것이다.
(롬 4:19-21)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
현실은 자신의 나이가 100세이고, 아내 사라의 나이는 90세인 것이 사실이다.
자신도, 아내도 마른 나무 같아, 아기를 잉태할 수도 없고 낳을 수 없는 나이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현실과 사실을 넘어서 있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심(眞心)로 믿은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무능과 죄악으로 암담하고 어려운 세상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심은 우리를 고생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시다.
(애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한다.
현실은 시험과 유혹도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넘어지고, 낙심도 한다.
그러나 현실을 넘어 그 어느 날,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나, 진실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현실을 넘어 변화 될 나의 모습이 (요일 3:2)에 나온다.
(요일서 3:2)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
현실의 나는 넘어지고 시험 들고 죄짓고 산다. 내가 나를 보아도 한심하다.
그러나 주님이 재림하여 오시는 날에는 나도 주님처럼 변화된다는 소망이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된다.
(계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의 비젼이다.
현실의 세상과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가 있다.
문제는 현실과 진실, 이 둘 사이의 괴리(乖離)가 너무 크다.
★ 이것을 무엇으로 메꿀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쓰러지고, 절망하고 만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자신의 나이와 아내의 상태를 볼 때는 현실이 암담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은 것이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실상은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인데 [받침대] 라는 말이다.
여기 마이크가 있다. 마이크가 홀로 서 있을 수 없다.
마이크를 세워주고 있는 받침대가 휘포스타시스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받침대와 같다.
그 믿음이 암담한 현실 속에 있는 우리를 붙들어 주고, 소망을 지켜준다.
현실은 몸도 아프고, 어렵다. 그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믿음이 있으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두렵지 않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암송하고 늘 입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출 23:25)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라.
현재는 병으로 고생한다. 낙심되고 괴롭다.
그러나 현재의 나를 넘어서서 은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건강이 회복될 진실의 나를 바라보는 것이 휘포스타시스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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