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관 (5)
★ 기독교 역사관의 특징 (4)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기독교 역사관의 네 번째 특징을 말씀드린다.
1) 첫째는 : 기독교는 역사성을 강조한다는 것.
2) 둘째는 : 기독교는 성육신 사건을 역사의 중심점(中心點)으로 본다.
3) 셋째는 : 인간의 역사 과정을 하나님의 인간 회복의 계획이 실현되어 가는 무대로 본다.
(오늘은) :
4) 넷째는 : 기독교 역사관은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개인, 개인, 나, 한 사람, 개인의 창조적 역할(役割)을 중요시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중요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기독교는 인간을 하나의 비인격적 기계로 취급하지 않는다.
하나의 국가 재산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역사의 주역으로 본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본다.
인간은 역사의 창조적 주역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속 계획을 반드시 인간을 통해서 이루신다.
하나님이 이루시되, 인간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자기가 다 하는 것같이 보인다.
죽을 정도로 돌에 맞고서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복음을 전하러 간다.
내가 쉬면 하나님의 일이 조금도 안 될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수고했다.
물론 여기에도 역설적인 면이 있다.
(고전 15:10) 내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으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기독교는 인간 개인, 개인의 희생적인 헌신과
창조적인 활동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하시니까, 나는 집에서 쉬고 있겠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역사관이 아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다 예정하셨으니까,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옛날에, 선교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이 다 하실텐데 우리가 뭐 성큼 나서서 아프리카에 가고, 인도네시아에 갈 필요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가야 하고,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삼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어 나가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여기에, 부름 받은 자는 축복이고 영광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부르시고, 세워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관은 인간의 중요성,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두 가지 양면성이 있다.
하나는 개인을 불러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어 나가는 구속 역사의 도구로 삼고,
동시에, 불신 세계를 향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빛과 소금으로 사는 면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와 불신 세상을 향한 사명과 역할이라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앞 시간(제 4과)에서 루터는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는 교회와 하나님의 왕국을 다스리시고,
왼손으로는 세상 나라를 다스리신다고 말씀드렸다.
이처럼, 하나님의 양면성을 말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양면적인 책임이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헌신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이 불신 세계를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한다.
정치적인 불의(不義)나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말 안하는 것은 벙어리 개라고 루터가 말했다.
물론, 욕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도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신 세계를 향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역할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개인의 모습이다.
끝으로, 개인으로, 내가 구속사적인 의식을 가질 때, 참 보람을 가지고 살게 된다.
나의 개인적인 고백일 수도 있고, 또 하나의 중요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결국, [기독교의 역사관은 구속사관] 이다.
이 구속사는 초역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초역사적으로 완성을 향하여 가는 구속사관인데, 나의 위치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구속사관 가운데서 나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내 삶은 보람이 생기고, 힘이 난다. 인생이 달라진다.
그래서 나 같은 것도 하나님 구속의 사역을 이루는 하나의 도구로 쓰임 받는구나.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과거의 누구, 누구도 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어 나가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처럼 오늘날, 나 같은 것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알 때,
내 삶에는 용기가 생기고, 의미가 생기고, 기쁨이 생긴다.
그 다음에는 이것이 종말론적인 완성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한다.
주님이 재림하여 오시는 그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데, 아직은 not yet 이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과 완성될 그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도구로 이 세상에 살지만, 쓰러질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려고 하지만, 실패할 때가 있다.
때로는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고, 핍박 받을 때도 있다.
그래서 쓰러지고 낙심도 되지만, 나 자신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도구로
쓰임받고 있는 나를 나 밖에서 보라. 얼마나 대견스러운가?
그럴 때, 여유가 생기고, 핍박을 받아도 이길 수 있고, 웃을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받고 있다고 믿고,
그런 역사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구속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옥에 갇히고, 핍박을 받아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을
다 하다가 생명까지 받친 믿음의 사람이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아 멘)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
역사의 주역으로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상으로 기독교 역사관 [특강]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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