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진짜 능력 (빌 4:10-20)
(감당하는 능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9
이 말씀은 정말 유명한 구절이며, 신나는 구절이다.
그래서 늘 오해가 된다.
성경의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오해되는 용어들이 종종 있다.
믿음, 영광, 축복, 능력... 등등을 잘못 이해하는 것을 본다.
(예를 들어)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주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다르다.
진정한 영광은 세상 영광이 아니다.
오늘은 [능력]이란 말에 대하여 풀어 보고자 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능력]이란 어떤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능력]의 개념이라면,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사도 바울, 그런 말하지 말고, 그 감옥에서 나오고 말하시오.”
그는 지금 로마 옥중에 있고, 그 곳에서 위문품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주제에 [내게 능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능력]이 있으면, 옥문부터 부수고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 상식으로 말하면,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에 성경의 놀라운 점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다.
구약은 많은 사건들을 기록하고 사건화하고 있고,
신약은 그 사건화 된 내용들을 정의하고, 규명된 단어들을 갖고 쓰요졌다.
(예를 들어)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설명한 성경이 히브리서 11장 이다.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을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
사건과 설명,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나요?
설명이 더 많이 담을 수 있다. 사건은 하나 밖에 담을 수 없다.
설명, 편지, 논문이라야 내용을 풍성히 담게 된다.
문제는 내용을 담기 위해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규명되지 않으면,
써 놓은 글이 오해되고, 딴 길로 가기 쉽다.
(이것이 성경해석학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이다.)
왜 구약의 그 많은 장수를 할여하여 사건들을 수록했는가?
단어들을 성경적 개념으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사건, 사건 속에서 단어와 용어들을 하나씩 정립해 나간 것이다.
이것이 죄다. 이것이 타락이다. 이것이 용서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거룩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구약은 사건들을 통해서 보여 준 정제되고, 정의되고,
규명된 단어들을 가지고, 신약 성서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구약보다 짧지만,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구약에서 사건으로 정의되고, 정립된 용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신약 성경을 읽으면 엉뚱하게 되어 버린다.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전후 문맥과 본문의 배경을 잘 보고 해석해야 한다.
왜 이단이 이단되는가?
성경 해석을 문맥에 상관없이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문맥과 배경을 잘 보고 13절을 이해해야 한다.
본문의 배경은 사도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그는 지금 궁핍한 자리에 있다.
외투도 필요하고, 양말도 필요하고, 생활 용품도 필요하다.
그래서 (10절 하) 너희가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되어 왔기 때문에,
현주소가 이동되니까, 우편물을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위문품을 보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드디어 현주소가 확정되었다.
로마에 있는 시위대 뜰안에 있는 감옥이다.
그래서 이제는 생활품, 위문품을 보내 줄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지금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위문품을 받게 된 것이다.
내가 내복이 없었는데 내복을 보내 주었구나
내가 양말이 없었는데 양말을 보내 주었구나
내가 외투가 없었는데 외투를 보내 주었구나
그래서, 행복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된다.
(11절)을 보세요.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이다.
내가 없었던 것을 받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웠고, 이어서 하는 말이 (12절)이다.
(12절) 내가 비천에 처할 줄 알고, 풍부에 처할 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나서 (13절)이 나온 것이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니까, 문맥상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
옥문을 부수는 능력도 아니고, 암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아니다. 홍해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슈퍼맨같은 그런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후 11:23-27)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으며, 3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3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능력을 논한다면,
슈퍼맨처럼, 초능력으로 지구를 역으로 돌리고,
배가 3번 파선했지만, 나는 물 위에 떠 있었노라.
태창으로 3번 맞았는데, 태창이 다 부러졌더라.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 맞았는데, 나를 때리려 하면 몽둥이가 부러지더라.
한번은 돌에 맞았는데, 돌이 튕겨나가 돌 던지는 사람들이 맞아 죽었노라고
이렇게 말해야 맞는 것 아닌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고후 11:22-27)에서 모두 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돌에 맞았을 때, 죽도록 터져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림을 당했다.
한번도 편안하게 지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는 사람이 춥고, 배가 고팠답니다.
하나님의 능력 속에 있으면 안 먹어도 되는 것 아닌가?
바울이 당했던 가장 쓰라린 고통은 동족의 위험이었다.
한 사회에서 매장되었고, 왕따 당했다는 말이다.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을 바울이 당했다는 말이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바울을 잡으려고 할 때,
광주리를 타고 들 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도망갔다.(고후 11:32-33)
마치 도둑이 도망가듯이 도망쳤다는 말이다.
정말, 사도 바울이 겪었던 고난과 핍박을 보며, 그의 간증을 들을 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빌 4장) 말씀과 함께 볼 때,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가 없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 그 무엇으로도 말릴 수 없었다는 것인가?
① 매를 수 없이 맞아도 말릴 수가 없었고,
② 감옥에 가두어 놓아도 말릴 수가 없었다.
③ 동족의 손가락질로도 말릴 수 없었고,
④ 춥고, 배고픔을 당해도 말일 수 없었다.
⑤ 돌에 죽도록 맞아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본문 (빌 4:11-12)을 다시 보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가 배불러지면 그만두겠다거나, 내가 배고파진다고 방해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빌 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없지만, (추가로 생각해 본 것은)
욕을 먹을 줄도 알고, 매 맞을 줄도 알고, 굶을 줄도 알고,
억울함을 당할 줄도 알고, 멸시를 당할 줄도 알고,
칭찬들을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고, 인정받을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이다.
칭찬들을 줄 안다는 말은 칭찬받았다고 우쭐하거나 교만해지지 않는 것이다.
멸시당할 줄 안다는 말은 누가 욕하고, 멸시해도, 낙심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것이
멸시를 감당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금 비천해진다고 해서 복음 전파의 일을 중단하지 않고,
그가 존귀해 진다고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방해받지 않는다.
바울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세상이 방해 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히 11:38) 이런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했다.
세상이 무엇으로 성도들을 방해하는 아세요?
세상적인 좋은 것으로 유혹하고, 핍박으로 방해한다.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세상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가는 것들이 있다.
세상 재미, 칭찬, 쾌락, 명예, 지위, 돈, 건강, 생명까지도 빼앗아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 다 빼앗겨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넘어지지 않는 능력이 있다.
세상적인 것을 빼앗겨도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적인 것으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을 주어도 넘어지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빼앗겨도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적인 것 때문에 예수 믿는다면,
세상적인 것을 빼앗길 때, 예수님도 버릴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세상적으로 발동되거나, 에너지화되지 않는다.
신앙생활은 돈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명예가 있어서 되는 것 아니다. 힘, 권력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있어야 예수도 믿고, 명예가 있어야 예수도 믿고, 지위가 있어야
예수도 믿고, 더 잘 믿는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그런 것, 다 빼앗겨도 무지지 않았다. 그래야 진짜이다.
★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하실 때, 3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① 돌을 떡 덩이 되게 하라. (육신의 시험) 물질 시험이다.
②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 (명예욕 시험)
③ 사탄에게 경배하면, 세상 권세와 영광을 다 주겠다 (권세욕)
★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거절하셨다.
예수님이 지금 하시려고 하는 일이 :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으로 하는 일도 아니고, 그런 것을 위해서 하는 일도 아니다.
예수님이 시험당하신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도대체, 여러분의 신앙이 무엇 때문에 발동이 걸리고,
무엇 때문에 신바람이 나고, 무엇 때문에 예수 믿을 맛이 납니까?
참 신자는 세상이 준 것으로 발동되지 않고,
세상적인 것으로 원인되지 않는 길을 가는 자이다.
세상이 우리에게서 다 빼앗아가도, 빼앗겨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늘나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세상이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세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돈을 주시기도 하고, 빼앗아가기도 하고,
건강을 주시기도 하고,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다 당할 수 있다.
무엇을 하고,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감당할 수 있다.
(이해가 되십니까?)
풍부를 당할 수 있고, 가난도 당할 수 있다.
그런 것으로 넘어지지 않는다.
풍부를 주고, 명예를 주었다고 홀까닥 넘어지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배가 불러도, 혹은 굶고 주려도 넘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박해하고, 풀무불에 던져 넣는다해도 타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대단함이 여기 있다.
이것이 신자의 삶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
ㄱ) 멸시(蔑視)를 당할 수 있습니까?
ㄴ) 업신여김을 당할 수 있습니까?
ㄷ) 창피와 수모를 당할 수 있습니까?
ㄹ) 오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ㅁ) 격멸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언제든지 우리 삶의 모범이신 예수님은 그런 모든 것들을
당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란?
수퍼맨처럼 하늘을 날고, 암병을 고치고, 희한한 표적가 아니라,
ㄱ) 울 수 밖에 없는데, 웃고,
ㄴ) 눈물 흘릴 수 밖에 없는데, 기뻐하고,
ㄷ) 원망할 수 밖에 없는데, 감사하고,
ㄹ) 빼앗겼는데, 찬송하고,
ㅁ) 억울하게 죽어가는데, 얼굴이 천사같이 빛나고,
ㅂ) 용서할 수 없는데, 용서하며 오히려 축복하고,
ㅅ) 가난해도, 부요해도, 흔들리지 않는 능력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주기철목사님은 못 판을 걸어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손양원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이다.
하나님은 고난과 슬픔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무엇을 증거하고
싶어서, 나에게 어떤 배역을 맡겼는지를 알아야 한다.
[거지와 왕자]라는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영화에서 거지역이 많이 나올까요? 왕자역이 더 많이 나올까요?
당연히 거지역이 많이 나온다. 그가 주인공이다.
거지는 밤낮 굽실거려야 한다. 무시 당한다.
장면 27, (배경 : 명동 한복판) 준비, 큐[Q]
거지 : “아저씨, 한 푼 줍쇼.”
신사 : 이 짜식이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욕하며, 귀싸대기 철썩, 때린다.
(이 때, 거지가 갑자기 배역에 없는 말로, 이렇게 대든다)
"아니... 어따대고 따귀 영화 때려... 촬영한다고 그렇게 쎄게 때려?"
그렇게 말하면, 이런 병신 배우가 어디 있어요?
거지의 배역은 잘 얻어터지고, 무시를 잘 당하는 것이다.
자기 역할을 알고, 자기 배역을 알면, 대들지 않는다.
잘 기억하세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무대, 우리는 천국의 배우들이다.
배우들의 대사(臺詞)는 성경, 감독은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통하여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모르니까,
자기 배역을 감당 못하는 것이다. 밤낮, 다시 찍어야 한다.
(감독 : 야, 이거 하나 못하냐?)
돈 한푼 줍쇼? 철썩... 매 맞고, 무시 당하기...
이거 하나 감당하지 못해서 매일 다시 집합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나중에 하나의 결말을 보기 위해서 잘 당해야 한다.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기 위해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배우처럼, 우리 인생길이 그와 같다.
우리는 각자의 배역만 있을 뿐이고, 각자의 무대가 있을 뿐이다.
각자의 무대에서 각자의 배역만 잘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의 배우들로서 먼 훗날,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했다 칭찬듣고, 상급받기 위해서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나에게 맡겨진 배역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 론)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는 말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슈퍼맨, 슈퍼우먼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 )할 수 있느니라.
( ) 의 답이 무엇인가? (감당)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잘 감당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유혹하든지, 핍박하든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잘 감당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