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우치는 말씀
-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 -
성공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원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성공의 가치와 내용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 원하는 것, 뜻하는 바가 세속적인 것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일 때 이를 성공주의라고 일컫는다.
원하는 것이 영구한 가치가 있고,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성공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좋아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돈, 쾌락, 명예, 권력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성공주의자들이다. 결국 가치관의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은 바로 이 가치관의 문제이다. 기독교적인 가치가 오늘날은 교회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의 대상은 바꾸었지만 가치관은 바꾸지 않은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영원히 소원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과 내용과 그 방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큰 차이가 없다. 목회자들 중에도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알고는 있지만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계속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휩쓸린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속주의의 광풍에 뿌리까지 흔들릴 지경에 있다.
왕룽의 길, 펄벅 여사가 쓴 소설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은 왕룽이다.
펄벅은 왕룽의 생애를 통해 중국인들 - 바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생관이랄까 그 가치관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듯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왕룽은 부자인 황가네 집에서 소작인으로 살았다.
그는 가난했다. 그런데 전쟁을 피해 피난 갔던 곳에서 뜻밖의 많은 보물을 얻어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던 그는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그도 지주가 된다. 그리고 부자가 되어 좋은 가마도 타고 다니며 기방(妓房)에도 들락거리다가 나중에는 아들보다 젊은 기생을 첩으로 삼기도 한다. 아내가 병들어 죽자 미안한 마음에 무덤을 아주 거창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들어갈 무덤도 미리 만들어 둔다. 왕룽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룽의 길을 간다. 열심히 돈을 벌고, 돈이 모이면 아파트 평수를 늘이거나 좋은 집을 짓고,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쾌락을 찾아 여유롭게 즐긴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무엘처럼 어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좋아서 그런 대견스런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동기는 매우 단순하고 유치하였다. 목사 되는 것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면 잘 먹고 옷도 잘 입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당시 어린 나에게 있어서 성공한 사람이란 출세해서 도시에 살고, 얼굴이 허옇고, 양복을 입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자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어린 나에겐 목사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유치한 생각은 목사가 되고 난 후에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스스로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말이다.
목사의 자랑은 교인들이 많은 것이고, 교회당이 크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례금을 많이 받고 좋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아주 자연스럽게 세속적인 성공관에 물들며 자랐다. 그때는 “잘 살아보세”가 우리의 노래였고 백성들의 소원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꿈이었다.
목사들의 꿈과 비전도, 비록 고상한 신앙적인 용어들로 포장하기는 하지만, 그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은 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큰 교회당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을 모우고 그래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적인 야심이 뒤섞여 분별이 안 되었으므로 양심의 가책도
거의 없었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을 위한 노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큰 충성이요 자랑스러운 헌신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성장주의와 성공주의 근년에 이르러 교회 성장주의는 목회자 성공주의와 동일한 용어가 되었다. 성장주의가 목회자들을 사로잡아 흔들어왔다. 한국교회의 타락의 주범은 성장주의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본질을 잃어버린 성장이다.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수가 더하여지는 성장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인의 수가 더하여지는 성장이다. 이는 경제영역에서의 물량주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많은 목회자들이 7-80년대의 양적 부흥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들도 모르게 성장주의 곧 성공주의에 함몰돼버렸다.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변질시키고 훼손하는 악한 사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상은 성장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장주의가 한국교회를 이렇게도 깊이 병들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성장은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부의 진리를 방패로 삼아 세속적 성장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자신들의 공로를 드러내주는 세속적인 명예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성장주의가 교회의 교회됨을 파괴하고 부흥을 왜곡시키며 진정한 성장을 가로막는 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성장운동은 많은 경우 바벨탑운동으로 변질돼 있다. 다들 아는 대로 바벨탑운동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는 말 그대로, ‘교인들을 많이 모우고 교회당을 크게 짓고 유명해지자’는 운동이다. 한국교회가 성장주의에 사로잡힌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7-80년대부터 "많은 교인, 큰 교회당"이 우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전도는 사람 모으기 운동으로 전락했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전도를 상업적인 판촉활동으로 여기고 있다.
목회자를 평가하는 교인들의 기준도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속어가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자기 목회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성장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인수를 늘리기 위해 설교나 전도를 장사하듯 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목사나 교회들이 교인수를 과장한다. 더구나 회개도 없고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례(침례)를 베풀고, 교회직분으로 교인들의 헌신과 충성을 사려고 이를 매매하듯 하고 있다.
제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사역"은 말뿐인 경우가 많고 큰 교회로 성장시켜 유명해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유명함에 따라 붙는 것은 권력이다. 일부 목회자들은 교회의 주이시며 동시에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영광과 힘이라도 가진 것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이다. 생계형 목회 한편 성공주의 목회의 뒤안길에서는 생계형 목회가 점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큰 교회를 세우고 유명해지자는 바벨탑운동형의 성장주의가 이제는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의 떡을 위하여”(겔 13:19) 예언하던 옛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생계주의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목회자로부터 눈물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구령사업에 헌신하겠다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신학수련을 받아 목사가 되고 교회도 개척하였는데, 한두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집세를 낼 돈이 없어 고민해야 하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해야 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기도보다 오늘 당장 얼마의 돈이라도 구해야 하는 일 때문에 당황해하고 있는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발견하고 울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질과 양 모두에서 쇠퇴하고 있지만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그 영광을 구가하고 있다. 작은 교회의 교인들이 대형교회들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와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고 또 대형교회가 가진 익명성 때문에 누구의 간섭이나 부담 없이 조용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숨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본질적인 기능과 사역에 집중하기보다 교인수 늘이기에 매달리다보니 교회도 결국 세속적인 경제논리를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고 여기에서 탈락된 목회자들은 우선 생존하기에도 버거운 현실에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성장주의나 성공주의는 큰 교회 목회자들만 갖고 있는 생각은 아니다. 어쩌면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더 그러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성공이란 말 자체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서,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교인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절박함에 항상 시달리고 있다.
이러면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요 10:10) 목회의 목적과 목표와는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이를 당장 확인하고 싶으면 해외에 있는 교포 교회들에 가보라. 교포 교회들을 보면 이런 현실들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포사회가 좁다보니 교인 수에 목을 매다시피 하고 있는 교회들의 가련한 모습이 송두리째 노출되고 있다. 복음사역을 위해서라기보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생계를 위해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다. 그런 교회들에 다니는 교인들은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에 약간의 불만만 있어도 예사로 교회를 옮긴다. 또 어느 교회로 옮기든 일단은 환영을 받기 때문에 철새 교인들은 그 교회에 다녀주는 것이 그 목회자에게 무슨 혜택을 베풀기라도 하는 듯한 마음으로 등록한다. 어느 교포 교회의 목사는 “교인들이 목사들을 가지고 논다.”며 탄식을 했다. 수(數)가 우상이 되다보니 교회의 정체성마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성장주의가 신학교까지 점령 성장주의와 성공주의가 신학교까지 점령했다. 어쩌면 신학교가 성장주의와 성공주의를 보육(保育)했는지도 모른다. 거룩한 소명과 거룩한 헌신으로 수행되어야 할 목회가 상업주의적인 경쟁으로 치닫게 된 데는 목회자 과잉 배출이라는 더욱 근원적이고 심각한 원인이 있다. 먼저 지금 한국에 신학교가 얼마나 될까?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한국의 종교현황」 (문화체육관광부, 서울 2008)에 보면 개신교가
운영하는 일반대학이 49곳, 대학원 대학교가 20곳, 전문대학이 27곳, 각종학교가 3곳으로 나와 있다(p.117). 여기에 모두 신학과가 있다 하더라도 집계 가능한 숫자는 100곳 이하이다.
그러나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명칭을 가진 교파만 해도 240곳이며(pp.38-55), 감리교와 침례교와 순복음교회 등 다른 교파들과 합하면 291곳이다. 여기에 파악이 안 된 교파들도 있고, 또 한 교파에 신학교가 둘 이상인 경우들도 많음으로 신학교의 전체수는 대략 잡아도 400여 곳이나 된다. 그리고 여기서 졸업하는 목사후보생들의 수는 역시 적게 잡아도 해마다 일만 명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이중 몇 %가 목사로 임직하는지 모르나 반만 잡아도 한 해에 5천 명이 배출된다. 목사의 과다 배출은 이미 교회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목사가 되어도 갈 교회가 없으므로 그 가정이 극빈가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문체부의 위 통계자료(2008년 12월 기준)로 보면 교회 수는 58,612곳이고 교직자 수는 95,596명이다. 필자가 속한 예장 고신의 경우 2015년 현재 교회 수는 2,049이고 목사 수는 3,563명이다. 여기서 합당한 사례금을 드리면서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는 자립된 교회는 반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목회자들이 사역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교회가 목회자를 구한다는 광고가 나오면 5-60명이 지원하는 것은 보통이고, 100명이 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회서는 목회자 청빙을 일반 회사들이 직원을 채용하듯 한다. 이렇게 해서 채용된(?) 목사에게 무슨 영적인 권위가 있겠는가? 이런 경쟁을 뚫고 부임한 목사가 자신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사람 모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학교들은 왜 이렇게 많아졌나?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신학교가 많아진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중심 말씀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에 빠지면서 우주가 폭발하듯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열된 교회지도자들은 교파주의에 빠져서 반드시 자체적으로 신학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다 자기 교파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목사후보생들을 배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량주의적인 성장주의가 신학교육까지도 지배해버린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정책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들의 심각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는 교회의 교회됨 곧 그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먼저 목회자들의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교회의 건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도자가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한다면 과연 그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겠는가? 오늘날 목회자들의 수준은 상식 이하의 수준까지 추락하고 있다. 근년에 목회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라. 일반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전에는 사이비 이단 종파에서나 일어났던 범죄들 곧 음란, 사기, 폭력, 살인, 방화 등의 범죄들이 멀쩡한 기성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가면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돼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종교는 성경적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돼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믿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타났을 때 그를 거짓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죽여 버렸다. 그럴 정도였으니 유대교는 다른 종교가 되었다는 정도를 넘어 메시야 종교를 대적하는 사탄의 종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중세기의 타락한 천주교 역시 기독교로부터 너무나 멀리 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성공주의를 넘어서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현상을 넘어 실상을 본다(히 11:1-3).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에 마음을 다 빼앗긴다. 그래서 잘못된 성공주의에 빠져서 타락의 경사로를 빠르게 내려가게 된다. 본질을 찾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더 확실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말한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히 11:3b).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시작이다. 참으로 성공한 사람은 실상을 알고 실체를 붙든 자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성공이다.
히브리서는 모세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세상적 가치와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얼마나 뚜렷하고 분명하게 대조되고 있는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세는 어리석은 자요 실패자이다.
개종 후의 사도 바울도 보자. 과연 그가 성공한 사람인가? 그는 구세주를 만난 것이 아니라 환란의 주를 만난 자처럼 살아야 했다. 핍박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살아야 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a)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가치 있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배설물처럼 여겨졌다. 여기다 우리가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목회자들은 교리도 알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알아야 하고 이를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가 무엇인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 잘 나오고, 기도 많이 하고, 연보 잘 하고… 그러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최고 가치인 사랑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아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나는, 내가 목사가 되고 3년쯤 된 어느 날 아침 나는 성령으로부터 로마서 12:1-2 말씀을 새롭게 받았다. “새롭게 받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하고 강력한 감동으로 본문을 읽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서의 전반부는 11장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이신칭의”라고 요약할 수 있다. 후반부는 12장부터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12:1,2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말씀이다. 1절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2절에서는 삶이 예배가 되는 그런 생활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1) 첫 번째 말씀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대”라고 번역된 낱말 “아이온(αίὠν, αίϖνοϛ)”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힘든 말이다.
NIV에서는 the pattern of this world라고 번역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삶의 패턴(풍조)이 있고 질서가 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우리 기독인들은 이런 세상의 패턴을 본받거나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2)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 마음은 생각을 말한다. 생각이 바뀌고 사고방식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가치관이 안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가졌던 그 생각 그대로 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미신종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3)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것을 우리의 가치로 삼고 우리의 삶의 목포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범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 뜻이 성취된 영역이 아닌가?
그 날 아침 나는 이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끝)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