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unter : 하나님과의 만남 (제 1과) / (총 12과)
(Encounter 내용은 L.A. 근교 은혜 한인교회 은퇴목사 고(故)김광신목사님이 강의 한 내용이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믿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어 올리오니, 은혜받으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 1 과 : 기독교 신앙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편 63:1-2)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많은 잘못된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기피하거나 혹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무관심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첫째로 :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은 으레히 재미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42세 때 하나님을 만나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저처럼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지마는 그 중의 한 가지가 바로 기독교 신앙은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주일날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장례식을 연상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볼 때는 이 세상은 총천연색 영화 같은데, 기독교 신앙생활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흑백 영화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77년 8월 20일 새벽에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기독교 신앙생활은
흑백 영화가 아니라 총천연색에 입체 영화로 보였습니다.
총천연색으로 보이던 세상이 오히려 흑백 영화로 생각되었습니다.
2) 둘째로 :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란 의지할 데 없는 연약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허구라고
잘못 생각을 합니다. 저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즉 기독교를 인간이 만든 종교라고 잘못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약자나 아녀자와 같이 연약한 사람들은 종교와 같은 허구가 필요하지만
저처럼 의지가 강한 사람은 저 자신만을 의지하고 살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니며 여러분과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엄연히
살아 계시고 또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셋째로 :
기독교 신앙은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삶만을 강요한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란 말을 들으면
학생시절에 무미건조하게만 여겨지던 도덕선생님을 연상하거나 혹은 순경이나
판검사를 연상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할지라도 그 분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러한 제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 분은 너무도 부드럽고 자비로우신 나의 아버지이심을 깨닫고 너무나 놀라서 4개월 반을 주야로 울면서 다닌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 신앙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기독교 신앙생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 왜 그럴까요?
오늘은 그 이유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
기독교 신앙생활은 여러분이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도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은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와 절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만약에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전혀 무가치한 것들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개미 한 마리나 하루살이 한 마리는 인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그 개미 한 마리 하루살이 한 마리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분은 바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미나 하루살이와 인간의 거리보다 인간과 하나님의 거리가 훨씬 더 먼 것입니다. 개미 한 마리, 하루살이 한 마리가 인간을 알 수 없을 찐대 인간은 얼마나 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사람이 스스로의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다고 결론을 내려도 그것은 한갓 증명되지
아니한 추측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스스로의 경험이나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결론을 내려도 그것 역시 증명되지 아니한 자기 추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결론은 하나님을 만남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이 다음에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을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신앙 생활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2) 둘째로 :
기독교 신앙 생활은 여러분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향유하기 위하여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꿈과 이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슬픈 사실은 사람들이 꿈과 이상이라고 할 때는 으레히 돈이나 권력 혹은 지식이나 명예 등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돈 자체를 위하여 돈을 벌려고 하거나 권력자체를 위하여 권력을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식 자체를 위하여 지식을 얻거나 명예 자체를 위하여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돈을 벌어서 액자에 넣어 두거나 혹은 벽에 부쳐 두기 위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요, 지식이나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그것은 혹시 돈을 벌면 행복이 있지 않을까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 곳에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이 있다고 한다면 부자들이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가 아니라
삶 속의 행복이요 만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우리 인류가 어디서 행복과 만족을 잃어 버렸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아야합니다.
이런 Joke가 있습니다.
어떤 신사가 밤에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술 주정꾼이 가로등 밑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습니다.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술 주정꾼이 허리를 굽히고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이
보기가 안되어서 그 신사는 그를 도와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형제여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술 주정꾼은 지갑을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신사는 5분이 넘게 가로등 근처를 다 둘러보았지만 지갑을 발견할 수 없었답니다.
그 신사가 다시 술주정꾼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지갑을 이곳에서 떨어 뜨렸습니까?”
그 술주정꾼이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바보 같은 사람아 내가 이곳에서 지갑을 떨어뜨렸다면
왜 지금까지 지갑을 찾지 못하겠는가?”
그 신사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갑을 어디서 떨어뜨렸단 말입니까?”
그 술주정꾼은 다시 너털웃음을 웃으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 길 모퉁이에서 떨어뜨렸지.”
그 신사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반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곳에 가서 지갑을 찾아야지 여기서 찾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 때 술 주정꾼이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멍청한 사람아, 그 곳에는 가로등이 없고 여기에는 가로등이 있지 않느냐?”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아무리 가로등이 있어도 그 곳이 지갑을 떨어뜨린 곳이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지갑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참 행복과 만족을 얻으려면 우리는 먼저 왜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없고 만족이 없는지 그 이유를 잘 알아야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세 가지 부분으로 지어 주셨습니다.
즉 영과 혼과 육입니다.
육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육체입니다.
혼이란 우리가 일상 회화에서 말하는 우리의 정신, 혹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감정이나 의지 등등은 우리 혼의 활동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동물이 육과 혼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반면, 인간은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 그러면 영이란 무슨 기능을 할까요?
우선 두 가지 기능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
영은 영원한 존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은 원래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영은 하나님의 속성을 따라 영원히 존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은 혼과 육으로만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육의 호흡이 끊어지면
그 존재가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육체의 생명이 끊어져도 인간의 혼은 영의 힘을 빌려 영원히 존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영혼은 영원 불멸인 것입니다.
2) 둘째로 :
영은 직감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색깔을 인식하는 것은 눈을 통해서 인식합니다.
그러나 소리를 인식하는 것은 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또한 눈과 귀가 아무리 있다고 해도 코가 없으면 냄새는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냄새는 반드시 코로만 인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맛은 혀로만 인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만들어 주신 것이
바로 영인 것입니다. 사람은 오직 영으로만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뜻으로 영은 T.V.의 안테나와도 같습니다.
T.V.에는 안테나가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전파가 들어와서 화면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인간에게도 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오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 아담 이브가 범죄 할 때 그 영이 죽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즉 T.V.의 안테나가 고장이 난 것과도 같습니다.
T.V.의 안테나가 고장이 나면 화면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인간도 영이 고장났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자연인이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난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심령가운데 있는 빈곳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15세나 16세가 되면 마음속에 빈곳을 느낍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고독이라고도 하고 허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모든 사람들은 사춘기가 되면 마음속에 공허감을 느끼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속에 있어야 할 영이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느끼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속에 빈곳을 느낄 때 그 빈곳을 채우고자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성장환경이나 성격에 따라 “혹시 돈이 있으면 빈곳이 채워지지 않을까?”
“혹시 지식이 있으면 빈곳이 채워지지 않을까?”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 권력, 지식, 명예 등을 자기의 이상으로 잘못 삼고 일생을 투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 있는 이 빈곳을 채우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죽어 있는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혹은 거듭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과 만족을 맛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다시 임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참다운 행복과 만족을 향유하기 위하여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3) 셋째로 :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슨 뜻이며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귀중한 것이 많이 있다 할 찌라도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중요한 “나”자신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삶을 살기 원한다면 반드시 먼저 이렇게 중요한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흔히 “나”라고 할 때 “나” 자신에는 두 가지 종류의 “나” 자신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거울로 볼 수 있는 “나”요,
또 한 가지는 거울로 볼 수 없는 “나”인 것입니다.
거울로 볼 수 있는 “나”란 나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요,
거울로 볼 수 없는 “나”란 우리의 영혼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울로 보이는 것이 육체이기 때문에 으례히 육체가 나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육체는 결코 참다운 내가 될 수 없습니다.
★ 육체가 “나”자신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 첫째 : 육체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포는 신진대사를 합니다.
피부세포는 2,3년에 한번씩 묵은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 속에서 가장 신진대사가 느린 세포가 뇌 세포나 골수세포인데 뇌 세포와
골수 세포도 20년이면 모두 교체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육체가 “나”라면 나는 20년 전의 “나”를 지금의 “나”와 동일한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엄연히 20년 전의 “나”, 30년 전의 “나”, 혹은 60년전의 “나” 자신이 지금의 “나”와 동일한 “나”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비록 육체는 변하지마는 변하는 육체 속에 변하지 아니하는 “나”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변하지 아니하는 “나”를 바로 성경은 나의 영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육체가 “나” 자신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영혼이 바로 “나” 자신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둘째 :
육체는 늙지만 늙어 가는 우리의 육체 속에 늙지 않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육체가 “나”라면 육체가 늙으면서 마음도 함께 늙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13세, 14세의 소년일 때 60대, 7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고사하고 30대 후반기에 들어선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볼 때 언제나 심심 산골에 노송나무를 연상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깊은 산골에 들어가면 오래된 노송나무들이 있는데 그 소나무들이 얼마나 늙었는지 내 손바닥보다 큰 껍질이 두껍게 덮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 소나무 껍질들을 볼 때마다 그 소나무 껍질들이 너무나 두껍기 때문에 밖에서 손가락으로 꾹 찔러 보아도 속까지는 그 감각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밖에서 바늘로 꼭 찔러 보아도 속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거울 속에 비치는 저의 얼굴을 보면 얼굴 피부가 너무나 얇은데, 30대 후반기에
들어선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얼굴피부는 상당히 두꺼워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봄철에 꽃이 피는 것을 보며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나 같은 소년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저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며 한 잎의 낙엽이 아스팔트 위를 바람에 불려 굴러가는 것을 보며 삭막함을 느끼는 것도 나 같은 소년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30대 후반에 들어선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밤에 안개 낀 부두 가에 앉아서 짙은 안개 때문에 배의 형체는 잘 보이지 않지만 배가 고동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떠나가는 소리를 듣기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두운 밤, 안개 낀 부두에 앉아서 그 소리를 들으며 한 두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나 같은 소년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아저씨 아주머니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 30대를 지나서 40대, 50대도 지나서 60대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봄꽃이 피는 것을 보면 마음이 싱숭생숭하며 배 고동소리를 들으면
어딘가 미지의 나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육체가 늙어도 결코 늙지 않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원시인이 처음 탱크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그는 스스로 탱크가 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탱크가 스스로 가는 것이 아니라 탱크 속에는 조종사가 있어서 그 탱크를 조종하기 때문에 탱크는 앞으로 좌로, 혹은 우로 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물질입니다.
물질은 원래 느낄 수가 없고 생각할 수가 없고, 또한 스스로 행동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육체 속에 그 무엇이 있어서 끊임없이 느끼며, 생각하며, 또 행동하게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나의 영혼이며,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육체는 집이요, 영혼이 그 집 속에 살고 있는 주인이라고 성경은 말씀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육체가 장막, 즉 임시 주거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후 5:1)
우리가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육체의 죽음의 참 뜻을 알게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육체의 숨이 넘어가면
나의 존재도 사라진다고 잘못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이란 육체 속에 거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 이사를 나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죽음을 “떠난다.(고후 5:8)”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없는 집이 썩어서 허물어지는 것처럼 영혼이 없는 육체도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육체를 떠난 다음에도 영원히, 영원히 존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이 영원한 존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나”인 나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영계로 들어갈 때 가는 곳이 어디일까요? 이 세상에서도 죄를 지은 사람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죄를 지은 영혼도 영계에 들어가면 영계의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그 영계의 감옥을 다른 말로 지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지옥에는 3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①첫째 지옥은 이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도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②둘째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③셋째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을 수도 없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은 21세기인데 어떻게 우리의 사후 존재가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
우리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것도 아닐텐데 어떻게 천당, 지옥이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
대개 이런 분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매우 비논리적이고 자기 자신은 굉장히 논리적이라고 잘못 생각합니다. 오늘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은 자기의 논리를 사용하셔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왜 나의 사후 존재를 믿지 아니할까?
나는 왜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아니할까?”
여러분이 믿지 아니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후 존재를 믿지 아니하고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후 존재를 믿지 아니하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아니하는 근거로서
어떤 다른 근거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기 전에 사람들은 미 대륙이 있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고 믿지 아니했어도 있는 것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우리가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사후 존재를 믿지 아니하고 우리가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사후의 존재가 있으면 있는 것이요, 천국과 지옥이 있으면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분은 사랑 이실텐데 우리가 죄를 좀 지었기로
그렇게 무서운 지옥을 만들어 놓고 기다릴 수가 있을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우리를 지옥에 보낼 수가 없으셔서
그 분이 2천년 전에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할 벌을 대신 받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전체가 말씀하시는 것, 복음이 말하는 것은 바로 2천 년 전에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받아야할 벌을 다 받아 주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고 너의
영원한 시간을 지옥에서 보내지 말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서 보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셨다든지 그 분이 우리의 벌을 대신 받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든지’ 하는 말의 뜻은 이 다음 시간에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생활은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행복과 만족을 향유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은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기독교 신앙생활은 절대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Grace Encounter에 계속 참여하시며 여러분이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사시고,
삶 속에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맛보시며, 또한 천국 가는 Visa를 받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을 도와 드릴 것입니다.
사 랑 합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