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Theodicy), 호신론
(시 73:1-20, 시 63:2, 시 119:36-37, 히 9:27, 히 4:16)
신정론(神正論)(Theodicy) :
하나님은 과연 옳은가? 에 대한 [그렇다]는 변증론 중 하나이다.
다른 말로, 호신론이 있다.
호신론(護神論)(Self-defense theory) :
하나님의 정당성을 보호(保護)하려는 신학적 이론이다.
이러한 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 라는 질문에서 나온 것이다. (시 73:1-16)
이러한 질문은 인류 역사 이래 늘 고민해 왔던 의문 중에 하나이다.
시편 73편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죄짓는 악인들은 형통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고,
건강하고, 재물도 많고, 죽을 때 고통도 없다.
그런데, 의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데, 고통이 계속된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정말, 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시편 기자는 이 문제가 고민이 되고, 풀리지 않아서, 그의 신앙이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했다. (시 73:1)
거의 넘어질 뻔한 것은 넘어진 것은 아니다.
넘어지지 않고, 다시 재기(再起)할 수 있었다.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17절)이다.
(17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있는 곳이다.
(시 63: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뵙게 될 때 :
아 ! 그렇구나....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知性)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풀리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온갖 복잡한 문제가 있어도, 주의 성소에 들어갈 때,
주님의 권능과 영광을 바라보면 해결된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 당시 거울은 동거울이어서 희미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성소에 들어가는 그 때에는 모든 의문이 풀릴 것이다.
(요 13:7)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18절)은 그들의 결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말한다.
(18절)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荒弊)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全滅)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까지나 악인들을 형통케 하실 것인가?
그들은 끝까지 멸망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악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형통은 곧 멸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악인들은 형통으로 인하여 교만해졌고, 그 교만은 결국 패망케 될 수밖에 없다.(잠 16:18)
또한, 파멸(마슈오트)에 던지셨다고 했다.
이 말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 단어는 '지옥'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시 35:8, 74:3 욥 30:3, 38:27).
따라서 본문은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주로 사후(死後)에 철저하고도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의 관심은 그들의 결국이다.
악인들의 최종적 운명에 관한 것이다. 악인들의 미래사(未來事)였다.
궁국적인 [하나님의 성소]는 새 예루살렘 성전 즉, 하늘에 있는 성전이다.
결국, 인간이 죽을 때, 그들의 결국을 알게 된다.
그렇습니다.
악인들이 이 땅에서 아무리 형통하고 잘 나가고, 건강하게 산다고 할 찌라도,
결국, 인간은 죽고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 다음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이 땅에서 잘 살다가 지옥, 파멸에 떨어지면, 얼마나 불쌍한가?
인간의 영지(靈智)는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계시 의존 사색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과 영생의 길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으로 향하여야 한다.
(시 119:36-37)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결 론)
신정론(神正論)(Theodicy) 하나님은 과연 [옳다]는 그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돌려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을 받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義)로우신 분이시다.
그의 사랑을 믿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와서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한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 은혜와 긍휼은 비슷하지만 좀 차이가 있다. 어떻게 다른가?
① 은혜는 아무런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사랑, 호의이다.
② 긍휼은 마땅히 받아야 할 징계와 형벌을 불쌍히 여겨 거두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은 구원과 죄(罪)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다.
인생의 장애물, 어려운 문제를 넘어갈 수 있는 은혜의 강물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늘 넘어지고 허물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도 필요하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달려 나아가는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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