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unter : 하나님과의 만남 (제 3 과)
제 3 과 :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본문 말씀 :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갖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국 가는 Visa를 받은 것이라고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Visa를 받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떻게 천국 가는 Visa를 받을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 예수님은 누구신가?
둘째 :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신 일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바로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바로 피조계에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뜻과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을 위하여 해 주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우리의 구원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죽음의 뜻을 분명히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우리 모두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 됨을 깨닫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참 신앙을 갖지 못하고 교회를 다닐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회개하라는 말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이 강대상에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면 저는 언제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왜 목사님들은 멀쩡한 사람을 죄인 취급을 할까?”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인들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면 주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무리 설명을 드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스스로 죄인 된 것을 깨닫기 전에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좋은 암의 특효약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이 암에 걸린 것을
알지 못하면 전혀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뜻을 올바르게 깨달으시기 위하여
여러분은 먼저 자신들이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 왜 우리 모두가 죄인인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왜 죄인인지를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이론과 인간의 이론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 지을 생각을 하고
죄를 짓게 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린 아기가 거짓말, 시기, 질투, 욕심, 이기심, 음란한 생각...
이런 모든 것은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죄성(罪性)을 갖고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나무에 사과가 맺히기 때문에 그 나무가 사과나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나무가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그 속에 사과나무의 진액이 흐르다가
계절이 되면 사과를 맺는다는 말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우리 조상,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죄인이 된 다음 자녀를 낳으니까,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성(性)씨가 김(金)씨 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김씨가 되기 위하여 어떤 노력도 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보니까 김씨로 태어나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나를 낳으신 나의 아버지께서 김씨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지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김씨가 되기 위하여 노력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세상에 태어나시니까 김씨로 태어나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할아버지가 김씨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조상 아담, 이브가 범죄하고 죄인이 된 다음에,
자녀들을 낳으니까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우선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죄란? 어떤 행위로 저지른 죄만이 죄가 아닙니다.
우리의 말이나 생각이 잘못되면 그것도 죄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의 말로는 하루에 우리의 마음 속에 대략 만개 정도의 생각이
오고,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때 그 만가지 생각 가운데 하나님
앞이나 사람들 앞에 내어놓았을 때 부끄럽지 않는 생각이 몇 가지가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하시면 우리는 분명히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스스로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첫째는 : 우리들의 잘못된 기억장치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기억장치는 그렇게 완벽하지 못합니다. 고장난 기억장치와 같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는 이웃이 잘한 것은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만 기억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잘못한 것은 잊어버리고 잘한 것만 기억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부부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까지 했는데 5년, 10년을 살다보면
두 사람 사이에 말로 표현 못하는 장벽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남편은 5년, 10년 결혼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아내를 실망시키고 잘못을 저지른 것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그래도 잘한 것만 기억에 남기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아내에 대하여는 그 아내가 자신이 아플 때 밤을 새워 간호해 준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에게 섭섭하게 대한 것만 기억에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다른 남자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가는 아내가 자기 사랑하는
남편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화를 냅니다.
같은 말을 다른 여자가 하는 것을 들으면 그냥 들어 넘기는 남편이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42세가 될 때까지 전형적인 불신자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전형적인 불신자로 살 때 저는 언제나 착한 것은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님을 만나려는 순간에 저 자신을 보니까 저는 너무나 새까만 죄인이어서
죄를 한번 더 지어도 더 까맣게 될 여지가 없는 그런 새까만 죄인이었습니다.
저는 죄인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통곡하며 회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새까만 죄인인데 어떻게 그 동안 내 자신을 착하다고
잘못 알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저에게 기억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42년 동안 인생을 살아오면서 잘한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① 첫째로 중학생 시절 겨울밤에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떤 거지 아이가 추워서 떨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저의 옷을 벗어서 그 아이에게 입혀 주고 간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든지 확실히 착한 일이었습니다.
② 둘째로 제가 막 고등학교 일 학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저의 급우 한 사람이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때 값비싼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친구를
길가에 있는 시계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시계를 팔아서 학비를 대어 준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착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③ 셋째로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여름철이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고갯길을 내려갔습니다.
제가 고갯길을 다 내려갔을 때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무거운 수레를 끌고
그 고갯길을 도로 올라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에게 말씀도 드리지 아니하고 저의 책가방을 그 수레 위에
올려놓고 뒤에서 열심히 수레를 밀어 드렸습니다.
고개를 다 올라간 다음 저는 할아버지에게 뛰어가서 “할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하고 도로 고개를 내려간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착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의 기억 속에는 언제나 그 세 가지만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자신이 가장 착하다고 잘못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일생동안 잘한 일이 몇 번 있었겠지만 그 잘한 일들을 다 모아도
시간적으로 일 주일이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41년 11개월 3주 동안은 죄만 짓고 살았는데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죄인이면서도 죄인 됨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죄인이면서도 우리들의 잘못된 기억장치 때문에
스스로 죄인됨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면서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 :
2) 둘째로 : 그것은 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어긋난 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양심에 어긋난 것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식인종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식인종들에게도 양심이 있습니다.
비록 사람을 뜯어먹고 살아도 동족은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양심이 있습니다.
만약에 식인종들에게 그 양심마저 없다면 어떻게 식인종이 존속할 수 있었겠습니까?
서로 다 잡아먹어 버리면 옛날에 식인종의 씨가 말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식인종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양심에 투철한 식인종이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동족의 살점은 한 점도 먹지 않았고,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동족의 피는 절대로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식인종 청년이 어쩌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와서도 자기의 양심에 투철했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동족의 살은 먹지 않았고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동족의 피는
절대로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침에는 백인 여자 한 사람 잡아서
흰 수우프(Soup)를 끓여 먹고, 낮에는 노란 한국사람 한 사람을 잡아서
노랗게 튀겨먹고, 저녁에는 까만 사람을 잡아서 바비큐를 해 먹다가 경찰에 붙들렸습니다.
법정에 선 그 식인종이 재판장에게 항의합니다.
“재판장님! 저의 과거를 다 조사해 보십시오.
저는 오늘까지 한번도 저의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미국 법으로 재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인간의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한번도 안 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하나님의 양심에 의하여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양심과 하나님의 양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이웃이 미워도 때리지 아니하고 죽이지 아니하면 잘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심은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보고 미워해도 이미 살인하였느니라”
인간의 양심은 아내 아닌 다른 여자와 잠을 자야 간음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심은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 앞에서는 비록 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양심 앞에서는
죄인이 아닌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말씀 드린대로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영계로 들어갈 때 우리의 영혼은 영계의 감옥 즉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의 측면이요
2) 둘째는 사탄, 마귀의 측면입니다.
1) 첫째로 : 하나님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는 하나님으로서의 여러 가지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두 가지 속성이 공의와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를 벌하시지 않으시면 안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를 벌하시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독생자 예수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지상에 살고 계시던 무렵에 지중해에 있는 그레테라는 작은 섬에 작은 왕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왕국에는 임금이 있었는데 그 임금은 공의로운 왕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왕이 공의롭다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백성이 죄를 지으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 같은 형벌을 주는 것이 공의로운 왕입니다.
그런데 그 왕에게는 홀어머니가 한 분 계신데 그 어머니를 사랑하는 효자로 유명했답니다.
그 나라에는 법이 있는데 그 법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조목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어떤 특정한 죄를 짓게 되면 사십대 채찍을 맞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채찍이란 짧은 손잡이의 끝에 몇 가닥의 긴 가죽끈이 붙어 있고
그 가죽 끈 끝에는 각기 쇠 방울들이 세 개씩 매달려 있는데 그 쇠 방울들은
모두 가시 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다고 합니다.
채찍을 맞아야 되는 죄수를 기둥에 묶어 두고 그 죄수의 등어리를 벗긴 다음 형리가
서서 그 가죽 채찍으로 내리치면 가죽 채찍이 떨어지는 곳에 살점이 묻어나며,
가죽 끈 끝에 달려 있는 쇠방울들이 채찍 맞는 사람의 살 속에 파묻힙니다.
그 순간에 형리가 그 채찍을 앞으로 나꾸어 채면 쇠 방울들이 그 죄수의 살을 찢습니다.
그 위에 다시 채찍을 때려서 앞으로 나꾸어 채고 그렇게 하기를 계속합니다.
그러면 웬만큼 몸이 건장하지 못한 사람들은 40대 채찍을 다 맞기 전에 숨이 넘어가며
아주 건장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데 그들도 등어리가 갈갈이 찢어져서 그 속에 있는
흰 뼈가 드러나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왕의 어머니가 그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탄로가 났습니다.
백성들이 두 패로 나뉘어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우리 왕은 공의롭기 때문에 어머니도 똑같이 벌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왕이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번에 어머니만은 용서해 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재판 날이 되었을 때 모든 백성들이 왕궁으로 몰려 왔습니다.
왕이 재판하는 결과를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왕은 친히 어머니를 국문 하다가 어머니가 그 죄를 지은 증거가 드러나니까
가차없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죄인을 기둥에 묶어라”
한 쪽에서는 백성들이 “왕이 정말 공의롭다”고 칭송을 하며,
다른 쪽에서는 “어떻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채찍에 맞아 죽게 할 수 있느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왕의 어머니를 끌고 가서 기둥에 묶고 있는 동안에 왕은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왕은 말없이 왕관을 벗고 웃옷을 벗기 시작합니다.
왕의 윗몸이 알몸이 되었을 때 왕은 말없이 걸어 내려와서 기둥에 묶여서 떨고 있는
어머니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 어머니를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왕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죄인을 쳐라!”
형리가 채찍을 들어 죄인을 치니까 그 채찍을 누가 맞습니까?
죄를 지은 어머니가 맞습니까? 아니면 죄 없는 왕이 맞습니까?
물론 죄 없는 왕이 맞지요.
왕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왕이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채찍을 맞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왕은 공의로워야 하기 때문에
죄를 지은 어머니를 용서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왕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자신의 어머니가 맞아야 하는 채찍을 대신 맞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그 분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지옥에 보내실 수가 없고
동시에 하나님은 공의로워야 하시기 때문에 죄인된 우리를 지옥에 안 보내실 수도 없습니다.
그 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죄 없는 그 분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까지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는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돌아가신 것은 죄인 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대속의 은혜, 전가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사야 53:5-6)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런데 주님의 죽으심은 또 다른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사망 권세를 깨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2) 둘째로 : 예수님의 죽으심을 사탄, 마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누구의 손에서
우리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마귀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사탄, 마귀의 종으로 태어나서 사탄, 마귀가 갈 수밖에 없는
지옥으로 가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 마귀의 존재는 아직은 여러분이 잘 이해가 안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탄, 마귀의 존재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의 종으로 태어났다고 말씀하시는데 (롬 6:17)
죄를 구체화시키면 사탄 마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탄 마귀의 종으로 태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벧후 2:19)에 있는 말씀대로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이브가 사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을
성경은 아담 이브가 사탄 마귀에게 졌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 이브가 사탄, 마귀의 종이 된 다음 우리들을 낳으니까
우리 모두는 사탄, 마귀의 종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 마귀가 우리들을 종으로 가두어 두는 무기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사망 권세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탄, 마귀의 위협에 굴복하고 사는 것은 바로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탄,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있는 우리들을
해방시킨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우리들을 사탄, 마귀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사탄, 마귀의 무기인 사망 권세를 깨치지 않으시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 사망 권세를 깨뜨리는 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부활인 것입니다.
그 누가 죽었는데 죽음 속에서 부활해 버리면 사망 권세라는 울타리는
자연히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면, 부활은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죄 없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롬 6:23)에 있는 말씀처럼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무도 부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까지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을 하시려면 먼저 죽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죽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으실 때 짊어지셨던 죄는 그 분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들의 죄였기 때문에 그 분은 사망 권세의 종이 된 우리들의 죄를 벗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벗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사망 권세가 더 이상 예수님을
죽음에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대단히 중요시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속박하던 마귀의 사망 권세는 이미 깨어졌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인간이 고안 해 낼 수 있는 사형 형틀 중에서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도 십자가 처형을 A.D. 315년에 폐지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아 주시기 위하여 가혹한 십자가 형벌을
대신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사탄, 마귀의 권세를 깨치시고 악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그 처참한 십자가 죽음을 자초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천국 가는 Visa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분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장사한지 3일 만에 다시 살아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요 3:16, 엡 2:8-9)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아 멘)
다음 시간 (제 4 강)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감 사 합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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