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unter : 하나님과의 만남 (제 4 과)
제 4 과 :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나?
본문말씀 :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우리가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1) 첫째는 :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불안감은 그 누구나 갖기를 싫어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이 너무나 싫고 두렵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개념을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죽어도
자신만은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미국의 정신과 의사 겸, 심리학자 :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Elisabeth Kübler-Ross, 1926-2004)가 1969년에 쓴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
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죽음을 선고 받고 이를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5단계 (Five stages of grief)
로 반응을 연구하여 발표 했습니다. 영어로는 각 단계의 첫 자를 따서, DABDA라고도 한다.
① 첫째가 : 부정(Denial)의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병원에 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의사가 여러 가지로 진단도하고 X-Ray도 찍은 결과 배속에 암이 다 퍼져서
수술할 길도 없고, 살 날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때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거부, 부정(Denial)하는 반응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잘못된 진단에 의한 오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병원을 찾아가 보기도 하고 다른 의사의 진단을 받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병원에서나 같은 진단이 내려질 때 사람들은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② 두 번째 단계는 : 분노(Anger)의 단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려야한단 말인가? 왜 나야? 화를 낸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기도합니다.
그래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아니하면 셋째 단계로 넘어가는데...
③ 셋째 단계는 : 타협(Bargaining)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생각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계셔서 나의 이 질병만 고쳐주신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하여
이런, 저런 일을 해 드릴텐데” 혹은 “용한 의사가 있어서 나의 이 병만 고쳐 준다면
나의 재산을 절반이라도 줄 텐데...”
그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깨달을 때 넷째 단계로 옮겨갑니다.
④ 넷째 단계는 : 우울(Depression)의 단계입니다.
결국 타협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극심한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다.
모든 일에 초연해지고, 웃음을 잃고 하루 종일 멍한 표정으로 있거나 아예 울어버리기도 한다.
⑤ 다섯째 단계가 : 수용(Acceptance)의 단계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이젠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게 된다.
이 단계에선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새 가족 여러분!
사람들은 왜 다른 사람들이 암으로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기다가 자신이 죽어야 된다는 선고를 받을 때는 이런 격렬한 반응을 보일까요?
그것은 평소의 우리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이 다 죽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는
잘못된 선입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든 사람들은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못하거나 죽음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이 근본적인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편안 해 지는지 모릅니다.
(구원의 확신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
2)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는 Visa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천국가는 Visa를 받아둔다는 말은 다른 말로는 나의 유일한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둔 사람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 영계로 들어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그 생명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 놓지 못한 사람은
그 영혼이 육체를 떠나 영계로 들어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원한 시간을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진 지옥에서 보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은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정이 불안한 나라의 재벌들은 자신의 돈을 스위스 은행에 맡겨 두기를 원합니다.
정권이 바뀌었을 때도 그 돈을 찾아 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돈을 스위스 은행에 맡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현찰을 큰 가방에 담아서 스위스 은행 앞이라고
쓴 다음 무조건 우송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그 돈이 스위스 은행에 예치가 되는지 조사를 한 다음 그대로 돈을 보내고
또한 스위스 은행에서 돈이 입금 되었다는 영수증을 받아 쥐어야만 안심을 하게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우리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면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께 맡겨졌다는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기 위하여 구원의 확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구원받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논리의 근저에는 구원이 인간의 의로 이루어진다는 잘못된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자신을 그만큼 의롭게 여긴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든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요일서 5:13)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즉 우리가 영생을 가진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 3:16)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 가운데 “저를 믿는 자 마다”라는 말은 “저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 이외 어떤 다른 조건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믿는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해 주신 일을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룩하신 일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31)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의존할 때 우리는 단순히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2)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로 :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체험을 통하여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기독교 신앙에는 법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법적인 측면만 있고 경험적인 측면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반면에 만약에 경험적인 측면만 있고 법적인 측면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체험이
올바른 체험이라고 확신 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신앙에는 반드시 법적인 측면과 경험적인 측면이 있어야 합니다.
조금 전에 인용한 성경 말씀들은 바로 우리의 구원에 대한 법적인 측면을 이야기 해 줍니다.
그런데 그 법적인 조치가 다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경험적인 측면, 즉 체험을 통하여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복권이 처음 생겼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는 신문지상이나 T.V. 방송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법적으로 그 상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확인되는 것은 그 복권의 상금이 자기 손에 쥐어질 때 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올바르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데,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성령을 받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가 구원받는 조건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하면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는
성령을 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행 2:38-39)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 말씀의 뜻은 이 다음 기회에 다시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령을 받는다”는 말을 “성령세례를 받는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혹은 “거듭난다”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는다”, “성령세례를 받는다.” 흑은 “거듭난다.”라는 말은
모두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과 우리의 구원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우선 우리가 구원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행 2:21)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결단과 그 결단의 지속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믿기로 결단을 내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내린 결단을 지속시키면 그것이 곧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 결단이 참된 결단인지? 아닌지? 판단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참된 믿음을 가졌을 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 1:22)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또한 (엡 1:13)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그러면 성령 세례를 받은 결과는 무엇일까요?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다섯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이 믿어집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예수를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상태라면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이 확실히 믿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15:26)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고전 12:3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즉 “나”아닌 다른 영이신 성령님이 내 속에 들어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구원자)라고
증거 해 주시기 때문에 예수가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첫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이 각기 다른 대상들을 지각할 수 있도록
각기 다른 기관을 만들어 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색깔을 지각할 수 있도록 눈을 만들어 주셨고, 소리를 지각할 수 있도록 귀를 만들어 주셨고,
냄새를 지각할 수 있도록 코를 만들어 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도록 영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뜻으로 우리의 영은 T.V.의 안테나와 같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T.V.에는 안테나가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전파가 들어와서 화면을 만들어
주는 것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영이 있기 때문에 오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하나님을
그 영을 통하여 지각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조상 아담, 이브가 범죄 할 때 그 영이 죽은 상태가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안테나가 고장이 나 버린 것입니다.
아담 이브가 영이 죽은 상태가 되어서 자녀들을 낳으니까 우리 모두는 영이 고장난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서 오늘까지 지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이
지각(知覺)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을 때 예수가 믿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2) 둘째는 :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롬 8:16)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때 :
결코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만 자녀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자녀를 삼으신다는 말씀은 성경 말씀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측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경험적인 측면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육신의 부모님의 자녀가 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호적상에 내가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 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 되는 것이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낳음을 받는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의 실질적인 아들이 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5)에서도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바”라는 말은 우리나라말로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낳음을 받은 자는 결코 누가 나를 낳았는지 증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기를 낳은 자만이 증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은 사실은 오직 성령님께서만 증거 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42년 동안 불신자로 있을 때 “신”이라는 개념 속에 “아버지”라는 개념은 전혀 없었습니다.
“초월자” “절대자” “완전한 자”라는 개념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하면 나로부터는 멀리 계신 분,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
나에게 완전한 삶을 요구하시는 분 등등의 인상 밖에 못 가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령을 받았을 때 그 분이 나의 아버지요, 내가 그 분의 아들이라는 것이
너무나 느껴져서 한없이 통곡하며 감사를 드린 경험이 있습니다.
3) 셋째로 참다운 기쁨과 평안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역시 첫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에게 만족과 행복과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모든 사람은 사춘기가 되면 자기 속에 빈 곳을 느끼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속에 있어야 할 영이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빈 곳을 느낄 때 이 빈 곳을 채우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 때문에 돈, 권력, 지식, 명예 등을 잘못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것들로는 결코 우리 마음속의 빈 곳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빈 곳이 생긴 것은 그 속에 있어야 할 영이 없어졌기 때문이지
돈, 권력, 명예, 지식 등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심령 속에 있던 빈 곳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참다운 기쁨, 참다운 만족, 참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4) 넷째로 : 성경 말씀이 믿어지고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참 저자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후 1:2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저는 성령을 받기 전에 성경을 세 번씩 통독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성경이 어디까지나 나와 상관없는 기독교의 경전으로만 느껴졌습니다.
저는 단지 지적인 호기심 때문에 성경을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제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께서 내게 쓰신 편지라는 사실이 깨달아졌습니다.
바로 성령을 받은 그 날입니다.
저는 성경이 너무나 궁금하여 혼자 서재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펼쳐보았습니다.
그 때 눈에 뜨인 성경구절이 (롬 8:26) 말씀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저는 그 구절을 읽는 순간 혼자 통곡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는 가운데 성령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심으로 제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군요.”
평소에 전혀 믿어지지 않던 성경 말씀이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5) 다섯 번째 :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성령님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임하신 증거 중 하나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행 1: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저도 성령이 임하신 그 날부터 열흘 동안 회사의 문을 다 닫고 L.A. 인근에 있는
제가 아는 사람들을 다 찾아가서 전도한 경험이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부터 원했기 때문에 한 일입니다.
성령을 받고 나면 주변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강렬한 소원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체험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각자의 체험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은 확실히 생각이나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이것을 성경적인 개념으로는 “속 사람이 변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등으로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새 가족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고 쳐두고 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얻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간절히 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감 사 합 니 다.
다음 시간 (제 5 강)에서는 “성경은 왜 읽어야 하며,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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