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관 (1)서론
김명혁교수
(이 글은 합동신학대학교 대학원 김명혁교수가 오래 전에 특강했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서론
먼저, (갈라디아서 4장 4-5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때를 주장하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을 역사 속에 보내시고,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씀이다.
또, 하나의 말씀 (요한 계시록 1장 8절)을 봅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α)와 오메가(Ω)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시작과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보여 준다.
기독교의 역사관을 말씀드리기 전에 “역사란 무엇인가?”를 말씀드립니다.
★ 역사란 무엇인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자연계와 인간계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들(Facts)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에 관한 한 가지 견해이다.
그래서 역사가의 과업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독일의 19C. 역사가 [랑케]가 이런 입장을 대표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나 사실(Fact)이 어떻게 발생했는가?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역사가(歷史家)의 할 일이다는 견해이다.
(둘째 견해)
2) 과거의 사건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견해는 현재를 강조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 역사라는 입장이다.
영국의 역사가 콜링우드, 그리고 딜타이, 크로체 라는 사람이 이와같은 견해를 가졌다.
그래서 역사가의 과업은 그의 마음 속에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다.
3)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
우리의 입장은 이와같은 양극단으로 치우칠 필요가 없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 E.H.카르가 지적한 대로 우리는 어느 쪽에도 치우쳐서는 안되고,
조심스럽게 그 중간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란?] 자연계와 인간계에 일어난 과거사(過去事)를 정확하게
기술함과 동시에 아울러서 그것을 오늘의 삶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이다.
즉, 역사는 [사건(Fact)과 해석(interpretation)] 을 동시에 포함한다.
또한, 객관적인 요소(Objective) 와 주관적인 요소(Subjective)를 동시에 포함한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붙잡는 것이다.
(예를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사건 그대로만 남아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오늘을 사는 내 삶에 어떤 능력을 부여하는가? 하는 의미가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오늘 나에게 어떤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하나의 딱딱한 옛날 사건으로만 그쳐도
안 되고, 그것이 틀림없는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오늘날 어떻게 내 삶을 뒤집어 놓았는가? 하는 면이 있어야 한다. 이
렇게 양면을 붙잡는 것이 역사를 보고, 공부하는 우리의 입장이다.
그래서, E.H.카르가 말하기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끝임없는 대화이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 신도들은 비교적 역사의식이 없는 것같이 보인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고, 그것을 오늘 내 삶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노력도 없다. 그렇게 역사의식이 결여(缺如)하게 될 때,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도 상실하게 된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도 없고, 내가 사는 이 시대를 정확하게 비판하고 판단하는
능력도 상실하게 된다. 역사의식이 부족하게 될 때, 삶의 방향 감각을 갖지 못한다.
삶의 목적 의식도 갖지 못한다. 삶에 대한 엄숙한 열정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현실을 도피하는 현실 도피주의로 빠지게도 되고,
또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안일만을 추구하는 개인적 안일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
(예화) 교회가 물질을 많이 소유한 때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중세교회가 그랬다.
어느 날,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떤 교황을 만나게 되었다.
그 교황은 돈을 많이 세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랑스럽게 이 신학자를 향해서 말했다.
토마스 박사! 지금은 교회가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아주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기를 “예,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회는 일어나 걸으라.
그렇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고 대답했다. 중세 교회의 부요함은 하나의 사건이다.
교회가 물질로 풍요해졌을 때 영적인 능력을 잃게 되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부족한 것이 없고, 부요하다고 했다. (계 3:17)
그런데 그 반면에 영적인 능력을 상실한 것을 보게 된다.
그러한 사건 하나, 하나를 바르게 볼 때, 그것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오늘의 교회 문제를 심각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교회가 정치적인 권력에 아부하고 결탁하고, 정치적인 권력을 누린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교회에 문제가 많이 있었던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것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오늘 내 문제를 정확히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인 안목이 없을 때,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독불장군의 횡포를 부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의 민족으로서 역사의식이 필요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역사관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영역, 구속사적(救贖史的) 안목을
가질 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놀라운 지혜와 용기를 소유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우선, 서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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