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3일 목요일

그리스도인의 능력(1) 자신의 참 모습을 보는 능력


그리스도인의 능력 (마태복음 16:21-28.)
(자기를 보는 능력
 
신앙 생활은 두 가지를 잘 연결됨으로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이루어진다.
믿음의 의식화 작업 
② 복음의 생활화 작업

1) 믿음의 의식화 작업 :
성경공부, 기도생활, 예배참석, 찬양, 부흥회 같은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는 것으로, 믿음의 의식화 작업이다
이것이 믿음을 키우기 위한 작업이다.
 
2) 복음의 생활화 작업 :
믿음의 의식화 작업을 한 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생활 할 것인가?
어떻게 생활에 적용하며 살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성경지식이 많아졌다
기도 열심히 해서 영력(Spiritual Power)도 생겼다.
그러면, 내가 배운 성경지식을 생활 가운데 어떻게 연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만일 성경지식은 지식대로 있고, 생활은 말씀과 관계없이 산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아무 의미가 없는 신앙이다.

 
한국 사람들의 신앙의식 구조를 보면 :
믿음의 의식화 활동은 매우 뜨겁게 잘 한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성경공부.... 등등 열심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삶에 연결될 때는 약하다.
믿음의 능력은 복음의 생활화가 이루어 질 때 :
그의 믿음이 살아있고,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화) 일본 교회 목사가 하는 말이 있다.
한국 민족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서 만들고자 하는 사회를 우리 일본은 오래 전에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직하게 살자, 친절하게 살자, 공중질서 잘 지키고 살자, 약속한 것은 가능한 한 파약(Break) 하지 말고 약속 지키며 살자, 위와 아래를 잘 구분하여 위계질서를 지키는 사회를 이루는 것 등등 우리는 이런 사회를 이미 이루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안 믿어도 그런 사회를 만들고 사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금 얕잡아 보고하는 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점도 있고 해서 할 말이 궁해졌다고 한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선교를 많이 하면서도 부끄러운 점은 분열이다.
신교 교단만 해도 127개의 교단이 있다. 127명의 총회장이 해마다 탄생한다.
왜 그렇게 많이 갈라져야 하는가?
신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사회가 아름답고 밝은 사회가 되어져야 한다.
 
크리스챤 사이언스의 조사에 의하면 전 세계의 50대 대형 교회 중 22교회가 한국에 있다고 한다. 4,500명 좌석의 본당에 꽉꽉 채워서 5부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다.
믿음의 열기 속에 믿음으로 차 있는 신자들이 많은 한국인데 기독교의 힘으로 변화와 개혁을
시킬 수 있어야 당연하다.

믿음의 의식화 활동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 보다 열심 있는 나라는 없다.
문제는 그 믿음을 가지고 이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복음의 생활화를 이룩할 수 있는가?
이것이 숙제이다.
세상은 능력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능력만큼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다. 열심히 기도한다.

 
기도란 무엇인가?
내 힘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인간의 선한 행위이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것이 필요한데 내 힘으로 불가능하오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까지 받으면서 얻으려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능력이 무엇입니까?
 
()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 절 주의 종으로 부르셨으면 능력을 주셔야 지요.”
능력을 주셔야 일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힘만 들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무슨 능력을 주랴?>
!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손 얹고 기도하면 다 나을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그런데, 기도하면 암병 같은 중병은 고사하고, 감기도 안 납니다.
예수님은 다 하셨으면서 종들에게는 안 주시면 어떻게 하랍니까?
(: 솔직히 말해서, 예수님 같은 능력이 있으면 목회가 참 잘 될 것 같다.
못 고칠 병이 없으니 ...) 이런 문제는 현재의 목사들만 가진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있었다.
()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지 못 했을 때: 왜 우리는 못합니까? (9:28)

 
◉ 주님이 가지고 계신 신비한 능력 (인생의 문제 해결자)
사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모험의 길을 떠난 것이다.
예수님께서 멀쩡한 사람에게 나타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다. 이것은 모험의 길이다.
그런데 예수님 따라 다니는 3년 동안 그들은 힘이 생겼고, 자신들이 주님을 따라 나서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대감과 희망의 꿈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던 신비한 능력 때문에 그랬다.
 
그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고통을 예수님이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1차적 욕구는 먹은 것이다. 2차적 문제는 , 건강의 문제이다.
3차적 욕구는 천재지변에 관한 문제이다.
인류 역사는 이것 때문에 전쟁했다. 임금은 영토 책임이 있다
훌륭한 임금은 땅 넓히기 위한 책임이 있다
이 시대는 땅 빼앗기 싸움은 안 해도 경제 발전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1) 일차적 문제 : 2000여년 전 예수님 당시에는 먹는 문제가 더 큰 문제이다.
굶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먹는 문제가 심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52어로 5,000명을 먹여 주시니, 제자들 생각에 우리가 주님을 
따라나서기를 잘 했지. 예수님만 따라 나서면 먹는 문제는 해결이 되겠구나.
 
2) 두번째 문제 : 배부르게 먹어도 고난이 있다. 병이 난다. 질병의 문제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못 고치는 질병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대에 소경, 문둥병자, 간질병, 앉은뱅이, 중풍병자를 다 고치셨다.
성경을 보면 고침을 받으니라.” 그것을 본 제자들은 만족했을 것이다.

3) 세번째 문제 : 천재지변의 문제이다.
7.5도 정도의 지진이 일어나도 땅을 흔들어 놓으니, 견딜 수 없다. 불안한 것이다.
돈도 소용없고, 집도 소용없고, 빌딩도 다 무너지니 소용없다.
천재지변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천재지변 앞에 인간은 꼼짝 못한다. 불가항력적이다.
그런데, 제자들도 천재지변을 만난 적이 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큰 광풍을 만나서 다 죽게 되었다.
이런 죽음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깨우니 예수님께서는 바다야! 바람아! 잠잠하라 하시니
바람과 바다가 잠잠하게 되었다. 이 분이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이제는 천재지변도 문제없다. 예수님만 계시면 다 해결된다.
 
그런데, 히브리 민족의 슬픔은 정치적 속박이다. 지금도 로마정권 아래서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소망은 민족의 독립, 국민적 해방이다.
그래서 묻는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지금 제자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 되시면 자신들은 괜찮아질 것을 믿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 
그 때가 되면 한 아들은 주의 좌편에, 한 아들은 주의 우편에 앉게 해주세요. 부탁했다
이와 같이 제자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니까, 독립된 나라에서 배부르게 먹으며 살고, 질병이 없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천재지변도 문제 없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된다는 꿈이 제자들에게 있었다.
 
4) 네번째 문제 : 가장 큰 문제 (죽음) 
그래도, 인간은 마지막에 만나는 또 하나의 남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이다. 마지막에는 다 죽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도 해결해 주셨다.

()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3일 되어 시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서서 :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그가 살아 나왔다. ! 이것 봐라. 죽은 사람도 살린다.
그런가 하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다.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안 죽어 ! 이젠 됐다.
그 당시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의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가슴이 부풀었다.

그렇게 기대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는 제자들에게 어느 날 예수님은 폭탄선언을 하신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인자가 예루살렘에 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다
그 때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아니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 일이 결코 주님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2)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능력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 주셔서 식량문제, 질병문제를 해결 해 주시고,
자연을 정복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그렇게 해 주셔야 지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 영광스런 길을 기대하고 있는 이 때에 예수님이 죽으신 다니,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셨는데 ... 말입니다.
 

여러분 ! 신앙생활의 고민이 어디 있느냐?
💜 주님이 내게 주시려는 것과 내가 얻으려는 것의 차이 때문에 문제이다.
이 차이가 우리의 괴로움이요 고민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려는 것은 이것이다.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으라

그런데, 제자들이 얻으려는 것은 왕 옆에 앉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공동체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희망을 품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할 수만 있으면 나처럼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풍부와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능력
여러분 ! 이 문제는 오늘날에도 같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도 그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나는 풍부에도 처 할 줄 알고, 비천에도 처 할 줄 아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풍부에 처하는 능력 : 이것 쉬운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이 풍부에 처할 줄 몰라서 미국 교회가 문 닫게 된 교회도 있다.
잘 먹고 잘 살게 되니까 향락 문화에 젖어 들어가서 향락만 찾아갔지,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하고 예배하지 않았다.
풍부해 지니까 예수님을 안 믿습니다. 청교도 자식들이 교회에 나오질 않는다.
큰 축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가난 할 때 기도합니다. 그런데, 가난을 벗어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풍부에 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가 하면, 비천에 처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가난은 참으로 힘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어떤 형편에든지 처할 수 있는 능력이 믿음의 능력이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부할 때에도 교만하지 않고, 가난해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경외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능력이다.


(예화) 평생 목회를 하면서 예수님처럼 화려한 기적 같은 능력이 단 한번도 안 일어난다 해도
그 미천한 목회를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들고 나아 갈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저 시골에서 얼마 되지 아니하는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면서 그들과 함께 고생해 가면서
남들이볼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미천한 목회일 찌라도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생명을 다해 붙들고 충성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능력이다.
 
잘 될 때 교만하게 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되지 아니할 때 어렵고 고난이
심할 때에라도,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능력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8)
 
그런 의미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믿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축복들이 몇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
자기를 보는 능력을 갖기 원하신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하신 설교는 회개하라고 하셨다.
회개란? 제자리로 돌아오라는 말이면서 자신의 참 모습을 보라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자기를 올바로 본 자들의 신앙고백들이 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은혜를 받고 나서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보았다.
(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전에는 자신이 의롭고 율법으로도 흠이 없는 자 인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영접하고 은혜를 받고 보니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탕자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탕자가 도무지 자기를 보지 못하다가 어느 날 자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그 때 탕자는 내가 누구인가? 
자기를 들여 다 보았을 때, !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거지로구나
그는 고난을 통하여 드디어 자기를 바로 본 것이다.
자기를 보았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 비천한 자리에서 내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살겠구나!
아들의 자격을 상실한 아버지 앞에 죄인 된 자기 발견한 것이다.
자기를 솔직히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희망이 보이게 된 것이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살 수 있을 텐데... 하고 그는 일어섰다.
아들 자격을 상실했고, 지금은 거지의 모습이지만,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품군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자.
여기에서, 인간은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 !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놀라운 은혜이며, 능력입니다.
 
또한, 구약에서 : 자기를 가장 잘 볼 줄 알았던 사람은 다윗이다.
시편 51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는 다윗의 참회록이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라고 참회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의 가장 위대한 점은 자기를 보게 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자기의 잘못을 보고 회개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다윗이 참회할 때 다윗은 밧세바에게 원인을 탓하지 않았다.
다윗은 그 당시 임금이었다. 임금의 권한이 있다. 함부로 임금 앞에 들어 올 수 없다.
그런데, 초라한 영감 나단이 선지자의 이름으로 들어와 책망할 때 :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 라고 참회했다.
 
그런데, 여러분 !
유대 나라 사람들은 다 밧세바를 욕하지, 한 사람도 다윗 왕을 욕하는 사람이 없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윗이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는 일이 없다.
모든 자기의 잘못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마음이 귀하다.
환경이 어떻고, 누가 유혹했고, 변명이 아니라정직하게 자기를 보았다
그것이 자기를 보는 능력이다.

그래서 시51편이 기록된 것이다.
내가 왜 죄를 지었나
모태에서부터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의 근성을 가지고 태어났도다. 
나는 항상 죄 지을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로다.
그런 착하고 선한 양심으로 정직하게 자기를 본 것이다.
 
(예화) 어떤 훌륭하신 목사님이 계셨다
성도들 중에는 유별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도 있.
그런데 그 교회 교인 가운데 11일에 심방 오겠다는 집사님이 계셨답니다.
일년 동안 설교해 주시고, 은혜를 입고했으니, 좋은 선물을 가지고 세배 드리려 가자는 것이다
그것도 일년 전에 예약합니다. 성격이 다양하다.
그런데, 11일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되었는데 목사님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
목사님도, 사모님도, 아들, 딸들이 다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래서 세배하러 갔던 집사님은 눈치 빠르게 얼른 나왔답니다

그랬으면 집사님은 그것으로 함구하고 끝냈으면 되는데...
집사님은 목사님 가정에 문제를 캐 낼려고 하는 심보가 있다.
사연인즉슨, 목사님이 한복을 잘 차려 입으시고, 너희들도 다 제일 좋은 옷 입고 나와 앉거라.
사모님에게도 방석을 깔아 주면서 여기 앉아보라는 것이다.
목사님이 사모님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주르륵 흘리시는 것이다.
아니 지금 왜 울어요? 애들도 바라보면서 차례로 눈물을 줄줄 흘리신다.
애들은 : 아버지 왜 그래요? 왜 울어요?
당신은 어려서부터 부잣집 규수로 자라나서 칭찬 듣는 처녀였소.
만일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더라면 얼마나 빛나게 잘 살았겠소?
너희 아들, 딸들아 ! 너희들은 내가 개척교회 할 때 얼마나 마음 고생했느냐?
사장 아들, 딸이면 얼마나 잘 살았겠니?
나는 가족들에게 죄 많이 졌다. 내 죄를 용서하길 바란다.
아버지 왜 그래요? 이러지 마세요?
우리 다 건강하게 잘 컷구요. 우리 다 대학 보냈잖아요.
사모님도 : 내가 언제 목사 사모된 것이 불평했나요? ... 그래서 울음 바다가 된 것이다.
 
그 목사님은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 목사님은 훌륭하신 인격자이시다. 목회도 잘 하신다.
그러나, 주변에 화려하게 보이는 부인이나 아들 딸들을 보았을 때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본 것이다. 그 때 그 집사님이 오신 것이다.
이것이 뭡니까
그 목사님에게는 능력이 있다자기를 보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신다.
 
형제여 !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느냐?
정직하게 자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성경공부 열심히 하는 것
기도 열심히 하는 모든 이런 신앙적 활동은 : 
결국 그런 자기를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그 목사님은 성경지식과 영적인 힘이 자기 생활로 들어 간 것이다.
사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남편이요,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자녀들 앞에서 나는 죄인이다. 내가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했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그리스도인다운 마음인가요?
 
나의 성경지식과 신앙 고백이 생활로 연결되는 것이 믿음의 참다운 능력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의 축복이 있고, 신자 됨의 영광이 있고, 능력 있는 신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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