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5일 토요일

다니엘의 감사


성경 : 다니엘 6:1-10
제목 : 다니엘의 감사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103:1-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금년 한 해를 돌이켜 볼 때에도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고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신학자 브루너는 말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 3가지는 
항상 있어야 하는데, 한 가지 더 항상 있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감사라고 했다.
마음으로 감사,입술로 감사,물질로 감사하며 여러가지 모양으로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야 한.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세상에는 고통과 환난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든지 저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고통을 치르더라도 끝이 문제입니다.
리 큰 고통이라도 Happy end로 끝난다는 보장만 있다면 고통을 잘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마지막이 기쁨이요, 감사이며, 영광스럽게 마칠 수만 있다면 :
우리는 어떤 고통이라도, 어떤 수고로움도 다 잘 참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끝에 가서 웃을 수만 있다면 과거의 고통은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 마지막의 승리가 문제입니다.
이것만 확실하게 보장된다면 과정 속에 있는 고통은 어떤 고통이라도 참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관이 있습니다. (8:28)
이 땅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천국에 가서 웃을 수 있는 영광과 상급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볼 때 반대로, 불행한 마침은 절망입니다.

(예화) 일생을 부귀와 영화 속에서 살았다 해도 인생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마쳤다면,
그는 슬픈 인생을 산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삶을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귀족 가문에서 귀하게 출생하고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려서 멋 떨어지게 살았던 사람이라 해도 그 마지막이 불행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슬픈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는 은총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그 고통자체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고난의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고통의 결론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자세가 문제입니다.
, 고통 자체보다는 그 고난에 임하는 자세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농부가 봄과 여름에 땀을 흘려가며 수고합니다.
그러나 가을의 풍년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한 시간, 한 시간, 순간, 순간을 하나님께 맡기며 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다니엘이라는 신앙의 사람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는 유다 나라에서 바벨론으로 붙잡혀 온 포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총리까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총리로서 남달리 뛰어난 지혜로 임금도 주위의 동지들에게도 인정받는 신하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란 내가 못나면 남들에게 무시와 조롱당하고,
내가 좀 나은 듯 하면 반드시 시기와 질투와 모함이 있기 마련입니다.
 
(3)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그만큼 지혜도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그러기에 다니엘의 주위에는 시기하는 자들과 모함군들이 있었습니다.
30일 동안 임금 외에 그 누구에게라도 기도하면 사자 굴에 잡아넣기로 한 것 모략에 임금도 인장을 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모함군들의 모략에 따라 사자 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로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어 사자 굴에 던짐을 받고 말았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처음과 과정은 모순되고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이 악한 무리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어가야만 하니 너무도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마지막 장면은 참으로 통쾌합니다.
마음이 심히 답답할 때마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이 본문 말씀을 주실 때가 많습니다.
 
다니엘서 6은 한 인생의 일생이기도하고, 모든 사건의 축소요, 온 인류 역사의 축소요,
더욱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볼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이렇게 역사 하시고, 이렇게 섭리하시며,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믿고, 이렇게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너무 나도 시원합니다.
모든 고통의 결과가 이렇게만 된다면, 그 누가 고통을 마다하겠습니까? Why not?
그렇습니다. 모든 일들이 이렇게 Happy end 로 아름다운 결론으로 마친다면,
과정 속에서의 고통은 다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통마다 이런 아름다운 결과로 끝나지 만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사자 굴에 들어간 순교자마다 다 천사가 내려와서 사자의 입을 막은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사자의 밥이 되어 순교하며 죽었습니다.
해산의 고통을 했다고 해서 다 옥동자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 아들을 낳았다고 다 복은 아닙니다.
억울함을 참았다고 다 해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끝내 나의 의로움이 밝혀지지 않은 채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서 찬송불렀다고 옥문이 다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이 다 Happy end 만은 아닙니다.
 
(벧전 2:19) 이하를 보면 3가지 고난의 종류가 나옵니다.
1)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2) 죄가 있어 매 맞는 고난이 있습니다. 심판적인 것입니다
3) 선을 위해 받는 자발적인 고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고통입니다.
 
다니엘의 고통은 애매한 고통도 아니고, 죄가 있어 받는 심판적인 고통도 아닙니다.
선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진리를 위해 살다가 받는 자원적인 고통이었습니다.
다니오 왕이 이튿날 새벽에 찾아와 살아있는 다니엘의 음성을 듣기까지는
우리를 분노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비록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는 그 순간에는 이 세상에서 패배자로 보이고,
그렇게 끝나는 것으로 보였을는지는 몰라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또한, 죽었다 해도 죽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지만, 끝이 아니었고,
3일 후 부활의 아침이 왔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는 끝은 아직 끝이 아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입구에 서서 죽음을 앞둔 그 순간에서도, 다니엘은 양심의 가책도 없었고
후회도 없었고, 부끄러움도 없었다. 얼마나 부러운 순간입니까?
! 이제 사자가 물어뜯을 때 육체적인 고통과 아픔은 있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겠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자 밥이 되어도 후회 없다. 아쉬움도 없다.
인생의 아쉬움이 없는 깨끗한 죽음의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으로 부럽고, 흠모할 만한 다니엘의 승리를 볼 수 있습니다.
사자에게 정말 물려 죽었어도 그는 승리한 것이고, 하나님도 승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세상엔 잘 살아도 고개 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답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살아도 떳떳한 사람이 있다.
성공해도 부끄러운 성공이 있고, 실패해도 가슴 내 놓을 수 있는 자랑스런 실패가 있다.

사도바울은 (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고백했다.
사도 바울처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다음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짧게 살았느냐? 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 양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내게 부끄러운 일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
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1)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왔지만, 특별한 은혜로 총리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
2) 지혜로운 마음을 주사 국사(國事)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신 것 감사.
3)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주신 것 감사
4) 지금까지 신앙 지켜 주신 것 감사
5) 이제 하나님을 섬기다가 순교하게 된 것 감사
6) 오늘도 두려움 없이 창문을 열고 떳떳하게 기도하게 된 것 감사
7) 순교자로 죽으면 천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을 감사
8) 다니엘은 지금까지 베풀어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씩 생각하며
감사했을 것이다.
이제 사자 밥이 되어 죽어도 아무런 원망도 없다. 다만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여러분
다니엘은 지혜와 명철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1달 동안만 문을 닫고 기도하면 됩니다.
모함꾼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할 수도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다니엘은 앞, 뒤가 꽉 막힌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기도했다.
기도하면 사자의 밥이 되는 줄 알고도 다니엘은 전과 같이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했던 것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향한 창문이 언제나 열린 사람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믿기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4:19-21)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윗도 자신의 무기보다는 골리앗의 무기가 더 좋은 줄 알았고, 자신의 신장보다도 골리앗의 체구가 더 큰 줄 알았던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다.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목동 소년 다윗의 믿음은 참으로 놀라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 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다니엘은 전과 같이 창문을 열고 기도했고, 죽을 각오까지 했다.
다니엘은 전에 친구들이 풀무불에 들어갔다가 살아나 온 사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도 하나님이 반드시 사자 굴에서도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사자의 밥이 된다하더라도, 다니엘은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기도시간에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깨끗한 죽음을 위해서 기도했고,
전처럼 어서 속히 유대나라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 될 것을 위해서 기도를 했을 것이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간 그 날 밤, 모함꾼들은 축하 잔치를 했을 것이다.
고 얄미운 다니엘은 이제 죽었도다. 다니엘의 죽음을 축하하는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밤에 다니엘은 천사를 만나는 일생에 가장 영광스런 날이 되었다.
사자의 털을 베개 삼아 천사와 함께 지내는 다니엘. 천국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최악의 시간을 최상의 시간으로, 최악의 사건을 최상의 사건으로 축복 받았다.
 
다니엘이 이렇게 승리하게 된 것은 23절에 있다.
(6: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 하나님을 의뢰함
었더라. 
다니엘이 그 날 밤에 천사를 만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귀한 것은 다니엘의 마음에 아 하나님이 역시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 더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기에 원망할 시간에 감사했고, 불평할 시간에 감사했다.
다니엘처럼 이렇게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이 있을 것이다.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예화)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리는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사람에게 저주가 있다면 3가지이다.
첫째는 :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아무리 믿어 보려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심령입니다.
 
둘째는 : 성경을 읽어도 요절을 외워도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지식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되고,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하는데, 이것이 안 들리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우찌무라 간죠는 말했다.
 
세번째 사람은 :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불평, 생각만 하면 원망뿐인 사람 저주받은 사람이랍니다맞는 말이다. 

(예화) 감사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고, 찾아보면 또 감사할 조건들이 찾아지고 발견하게 된다.
 
(결 론)
다니엘처럼 충성스럽게 살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리고, 내 양심 앞에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은 죽음 앞에서도 우리를 승리하게 할 것이다.
나의 연약함을 알고도, 환경이 불리함을 알고도,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결코 실패가 없는 승리가 주어질 줄 믿습니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다니엘의 사자굴 사건을 통해서 인생을 승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고,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고통이 변하여 새 노래가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 가운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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