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히 8:1-6, 딤전 2:5-7)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알고
신앙을 올바로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구원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완전한 인간으로만 믿는다.
몰몬교에서는 예수님을 하나의 선지자로, 통일교에서는 실패한 메시야로,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아니고, 다른 메시야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자이시요, 구원자이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창세기 :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출애굽기 : 유월절 어린양으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다.
레위기 : 제사 제도를 통해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신약에 와서 :
4복음서 :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의 족보와 출생으로부터
그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선포하고 있다.
로마서 :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를 증거하고 있다.
본문 히브리서는 대 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성경책이다.
(6절)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론, 기독론을 말씀한다.
즉, 예수님은 누구시냐? 하는 것을 히브리적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본질은 무엇이며? 우리와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다는 것이다.
예수는 제사장이시며, 제사장의 역할은 중보자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사이 중간에 서서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 드리는 사람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속죄제물, 화목제물 ... 등등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제물이 되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며,
중보자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며, 나아가시는 분이시다.
오늘은 성례식이 있는데 중보자란 어떤 분이며, 어떤 역할을 하며,
중보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말하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 중보자란 어떤 분이신가?
1) 두 인격 사이에서 서로를 만나게 하고 화해시키는 자가 중보자이다.
서로 서로 영영 만날 수 없는 자들을 만나게 하고 화해하게 만든다.
원수를 친구로 만들기도 하고,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받는 자녀로 만든다.
미운 사람을 사랑스런 사람으로, 불편한 사람을 편한 사람으로,
보기 싫은 사람을 그리운 사람으로, 말하기 싫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만든다.
우리는 본래 죄인이었기 때문에 영원토록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중보자가 되시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시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와 기도 할 수 있게 만들고,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게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중보자가 없이는 양자가 만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양자가 다 중보자를 믿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또한, 중보자는 양쪽을 다 알아야 한다.
중보자를 통해서 두 양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화) 결혼해서 첫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남편이 탈선하여 가출했다.
집에 안 돌아온다. 부인 혼자 고생하면서 살았다. 아들이 20살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제 갈 곳이 없어서 돌아온다. 어슬렁 어슬렁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 설거지하는 아내가 보다가 밖에 서 있는 남편을 보고 깜짝 놀라 들어오라고 한다.
옷 갈아 입히고, 밥상 차려 준다.
문제는 아들이 학교 갔다 돌아와서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네 아버지다.
아들이 대답한다.
“난 아버지 없어요. 난 아버지 본 적도 없고, 아버지 사랑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저 사람 내어 쫒으라” 고 소리친다. 당신이 뭐라고 여기 나타났느냐? 고 항의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오히려, 속이 상해서 병이 들고 병이 악화되어서 죽게 되었다.
이제 어머니가 임종하게 되었다. 임종시간에 두 사람이 와, 서 있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양손을 가지고, 한 손은 남편의 손을, 한 손은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한다.
아들에게 : 아버지라고 불러라.
이 부탁은 평생 사랑하던 엄마가 죽으면서 부탁하는 유언이며, 요구이다.
또, 남편에게는 “내 아들아!” 라고 불러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손을 잡은 양손을 하나로 묶어서 가슴에 놓고 죽었다.
그 후에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영영 원수이다.
그러나 중간에 어머니가 애타게 소원하면서 두 사람 사이를 화목 시켰다. 이것이 중보이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갈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만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한 손은 나 같은 죄인의 손을 붙잡고
화목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은 대 제사장이시며,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보자 중에서도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제사장은 일시적인 제사장이지만, 하늘에 계신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이 땅의 제사장은 모형이고, 상징이고, 가상적이고 예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의 본체이시다.
다같이 본문 1절을 봅시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장막을 부리는 자라.
즉, 하늘의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 그 분은 제사장은 본체이시고,
참 제사장이시다는 말이다.
2) 중보자(제사장)는 제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다. 제사장은 제물을 드리는 자이다.
(예화) 오래 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여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린 적이 있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러분!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삭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삭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헌신을 원한 것이다.
참 제물은 이삭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었고, 아브라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아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을 원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사랑하고 가장 아끼는 모든 것, 자기 의(義), 자기 명예, 자존심,
“나” 라는 존재에 대해 집착하는 나 자신의 그 소중한 것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제사 드릴 때, 나를 대신해서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이 내 대신 죽었다.
그러나 사실상 본인의 회개가 없이는 양, 염소, 소 같은 짐승은 의미가 없다.
내가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양과 염소만 드린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여러분 ! 내가 죽으면 자유하고 행복할 수 있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다.
피 = 죽음이다. 피 = 생명이다.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죽어야 마땅한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은 것이다.
3) 제물의 조건이 있다.
제물이 되는 조건은 흠이 없어야 한다.
(레 1: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레 3: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레 22:20)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민 28:31)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래서, 제물이 되려면, 그 제물이 짐승이든지, 사람이든지 흠이 없고 깨끗해야 한다.
제물이 되려면, 죄없는 자가 죄인을 대신해서 죽어야 죄인이 살아날 수 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주님은 죄가 없는 의인으로 태어나서 의인으로 살다가 죽으신 것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나게 된 것이다.
의인이 죄인처럼 되어 죽으신 것이다.
죄인이 죄인으로 죽는 것은 죄의 댓가이다. 억울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의인이 죄인이 되어 죽어야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이며, 대속의 은혜이다.
우리가 사는 길은 이 길 밖에 없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 의로우신 예수님,
흠과 티가 없으신 예수님이 저주받는 자처럼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이다.
♪ 아무 흠도 없고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네
이는 날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사 깨뜨리신 주님의 몸일세
이는 나 위하여 형벌을 받으사 주가 친히 대신 흘린 주님의 보혈일세.
4) 끝으로,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이시다.
언약이 있다. 어떤 언약입니까?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 백성으로 받아 주시겠다고 하는 언약이다.
성경에는 약속이 있고, 언약이 있다.
약속과 언약의 차이:
약속(約束) : 우리끼리 하는 것이다. 약속은 했다가 취소할 수 있다. 약속은 수평적이다.
언약(言約) : 말씀 “언(言)” 약속할 “약(約)” ➡ 말씀으로 한 약속.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을 언약이라고 한다.
약속은 취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언약은 취소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한 약속이기 때문에 취소가 안 되는 것이다.
신실하시고 변개가 없으신 하나님의 주신 언약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구원을 주시기로 언약하신 것이고, 죄 용서해 주시기로 약속해 주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약속입니까? 그래서, 이것은 유언과 같은 것이다.
죽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주는 명령이요, 약속이다.
유언한 사람이 죽어버렸으니, 고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 자신이 싸인 한 것이다.
영원히 고치지 못하는 말씀의 약속을 언약이라고 한다.
6절 끝에 :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더 좋은 언약의 중보라고 했다.
이 말은 중보자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언약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라는 말이다.
(예화) 한번은 종교 개혁자 루터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마귀가 나타나서 루터가 어릴 때부터 지은 모든 죄들을 낱낱이 지적하더랍니다.
너무도 많은 죄였습니다. 너는 이 많은 죄 때문에 종교개혁은 고사하고 지옥 가게 될 것이다.
그 때 루터는 대답했다. 아마도 네가 지적한 죄 말고도 죄가 더 있을 텐데 ...라고 하면서
루터는 다시 말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피가 내 모든 죄를 씻었느니라.
그러니까 마귀가 놀라 도망갔다고 합니다. 루터가 꾼 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사람에게는 마귀의 고소도 무섭지 않다.
꿈에도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보혈...
오늘의 성찬은 예수님의 피를 기념하는 예식이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면서 중보자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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