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 시편19:7-11
제목 : 성경 읽는 방법
오늘은 성서 주일이다.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을 주신 것은 큰 축복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져주는 축복들이 들어 있다.
시19:7-1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성케하고, 지혜롭게,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꿀 송이 보다 더 달다고 하였다.
우리 이민 생활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서 꼭 성경 읽는 습관을 가집시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오늘 성경을 읽고 보는 방법을 배우고 또 1년 동안 1독 이상씩 성경을 읽어 은혜를 받자.
(예화) 한번은 목사님 3명이 극장에 갔다. 활동사진인 입체영화를 보러 갔다.
입체 영화는 그냥 보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성경을 볼 때 그냥 보면 예수님이 안 보인다.
마치 안경을 안 쓰고 입체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안경만 쓰고 성경을 안 보면 소용없다.
노인들은 돋보기가 없으면 글이 안 보인다.
예수님 얼굴 보이는 사람과 안 보이는 사람이 있다.
◉ 그러면 성경을 볼 때 어떻게 보아야 성경에서 예수님도 보이고, 은혜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가요? 성경을 읽을 때 :
1) 어떻게(How)가 아니라, 왜(Why)라는 안경을 쓰고 보아야 한다.
언제 어떻게 무엇이 일어났느냐? 하는 것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이다.
그러나, 누가? 왜?를 말하는 것은 성경이다.
(예) 오병이어 ... 어떻게 먹였을까?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주님께 드리니까 어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다 꺼내 놓아서 장정 5000명이 먹을 수 있었다.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가 아니라, 왜? 먹였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홍해바다를 건넜을까?
어떻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을까?
책이든지, 소설이든지 ... 다 작가의 의도가 있다.
그러므로, 그 의도를 알고 읽어야 한다. 그 의도를 알고 읽으면 이해가 잘 된다.
(예화) 평양 옆에 “용가”이라는 마을에 용각이라는 종이 살았다.
주인이 말하기를 너 내일 아침에 일찍 평양에 갔다 와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침에 용각이를 찾아보니 용각이가 없어졌다.
종이 저녁 늦게 나타나서 하는 말이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용각이는 주인이 내일 아침에 일찍 평양에 다녀와야겠다 고하는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왜 성경은 주셨는가? 왜 이스라엘을 홍해로 건너가게 하셨는가?
왜 광야 길로 가게 하시며 만나를 먹이셨는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 왜 거듭나야 하나?
말씀은 3가지 용어가 있다.
① 요1:23 :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다고 했다. 소리다. Phone
② 눅 5:5 :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서 말씀은 레마
③ 요 1: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로고스다. 로고스는 하나님 수준이다.
하나님 수준의 로고스가 인간 수준으로 내게 주어지는 말씀이 레마이다.
소리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소리이다.
이 소리라는 파장 속에 뜻이 담겨지고, 의미가 들어갈 때 말씀이 되고, 그 말씀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 내게 깨달음도 있고, 은혜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러므로 말씀을 볼 때는 그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글 속에 담겨져 있는 뜻과 의미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가 아니라, 왜? 라는 안경을 쓰고 보아야 한다.
2) 의심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아주 기본 조건이다. 불신앙이 없어야 한다.
표적과 기적(miracle)은 다른 것이다.
표적은 당연한 Sign (표식)이다. 그러나, 기적(miracle)은 요행스럽다는 뜻이 들어 있다.
성경의 기적은 우연의 사건들이 아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당연한 표적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표적과 기사를 볼 때 아멘의 마음을 갖고 믿음이 앞서야 한다.
성경은 창세기 1:1 으로 시작되는 성경이다. 성경은 창세기 1:1을 기초로 하고 있다.
창 1:1만 믿을 수 있으면 나머지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전제하고 믿고
읽어야 성경을 왜라는 각도에서 볼 수 있다.
(예화) 리더스 다이제스트 :
실종되었던 군인이 수년 만에 비밀리에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밀이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졌다.
아내는 아름다운 식탁을 준비하고 마중 나갔다가 길이 어긋났다.
남편이 자기 집에 와보니, 아름다운 식탁이 준비되어 있는데 다른 남자를 기다리는 아내인
줄 알고, 다시 떠나 버렸다. 그러나 아내를 믿었더라면 그 식탁은 정말 멋진 저녁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론과 논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Theory, logic
성경을 이론적으로 보지 말고, 논리적으로 보아야 한다.
믿으면 됐지 무엇을 그리도 따지는가? 따지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예) 예수님 사진이 잘 안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보인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3) 성경은 인간의 뜻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격언집이나, 금언집이 아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예화) 어느 시골 마을에 두 영감 부부가 살았다.
할아버지가 몰래 거울보고 장롱 속에 감추곤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간 사이에 할머니가 꺼내 보니까, 그 속에 왜 여자가 그 안에 속 들어 있다. 이 나쁜 영감 왠 여자를 숨켜 놓고 나 몰래 늘 쳐다보는 구나...싸움이 벌어 졌다.
무슨 여자 그 안에는 노친네 남자가 들어 있었어. 싸운다.
남편이 보면 남자가 들어 있는데, 여자가 보면 여자가 들어 있다.
영감이 보면 영감이 있다.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을 청빙한다.
그 교인들은 우리가 원하는 말을 해 줄 목사님을 찾았다고 한다.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목사를 찾아야 한다.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목회자가 모든 사람의 의견을 다 들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다 다르다.
(예화) 이솝우화가 있다. 아버지, 아들, 당나귀
아버지를 태우고 갔더니, 아들 고생시킨다고 비난이다.
아들을 태우고 갔더니, 불효자식이라고 비난한다. 둘 다 같이 타고 가니까
당나귀 고생시킨다고 비난한다. 둘 다 안 타고 걸어가니까 왜 안타고 가느냐고 야단이다.
할 수 없이 이제는 당나귀 양발을 묶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어깨에 메고 갔다고 한다.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들을 수 없다. 오직 주님의 음성만 들어야 한다.
4) 분석이 아니라, 종합으로 보아야 한다.
옛날 목사님들은 말씀을 잘 쪼갠다고 한다.
이 말을 성경 한 절을 가지고 깊이 다룬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멧세지인데 중간에 한 절만 가지고
지나치게 따져서는 안 된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한다.
부분적으로 보지 말고, 전체적으로 보라.
(예화) 우리가 지도를 보고 집을 찾아가는 수가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이리로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지도는 반대로 말하고 있다.
지도는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5) 성경은 지식적으로 연구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말씀을 경험하라고 주신 말씀이다.
만일 성경을 지식적으로 연구하면 성경에 관한 지식은 알 수 있어도 그 목적은 도달 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지식은 있어도, 영생을 경험 할 수 없다.
거듭나라. 진실하라. 서로 사랑하라. 겸손하라. 서로 용서하라...
말씀을 경험하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0:35)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신(God)이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다.
따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지식으로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말이다.
거듭나라고 하면 중생의 체험을 경험한 사람들을 신이라 했다.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경험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공부를 하고 말씀 훈련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적인 권위로 능력 있게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이 말씀을 내 것으로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6) 이 말씀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모순을 지적하지 말고, 그대로 믿어야 한다.
지적하지 말라. 하나님의 모순을 지적하면 하나님보다 더 위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예) (창세기3:5) 선악을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선악의 기준을 아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 먹은 다음부터 자기 나름대로 선악의 기준을 갖고 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남편도 틀렸고, 아내도 틀렸고, 대통령도 틀렸고, 교회도 틀렸고,
목사도 틀렸고... 심지어 자기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도 틀렸다고 하면서 모순을
지적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다.
아브라함을 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 믿음이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고 순종했다.
내 생각에는 여러 가지 모순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순종하겠나이다.
그 분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니, 그 분은 맞고, 나는 틀리다.
우리가 자꾸 자꾸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겠다는데, 우리가 말하는 합리와 비합리의 판단
기준은 나의 판단기준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불합리가 아니라, 초 합리적이시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었다. 초과학적이다.
7)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생명과 영의 양식으로 알고 읽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 필요한 말씀이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은 판단을 최후에 두신다. 사람들은 첫인상에 둔다.
왜 예수 믿는데 기쁨이 없는가? 예수님에 대한 첫 인상이 별로 안 좋다.
예수님은 연보 거두어 가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 시간 빼앗아 가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 분은 생명 되신 예수님이시다. 나를 위해 생명까지 버리신 분이시다.
8)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읽어라.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마다
성령님의 조명이 있어야 진리를 깨닫게 된다.
(결 론)
아무리 성경 읽는 방법을 알아도 문제는 읽는 것이다.
시간 내서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루에 15분만 내자.
(시19:7-1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소성케하고, 지혜롭게,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꿀 송이 보다 더 달다고 하였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성경을 사랑하고, 믿음의 눈으로 이 말씀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여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복된 심령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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