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 (마 12:15-21, 사 42:1-4)
(20절) 그는 진리가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실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은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구절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본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이다. (사 42:3)
즉,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의 사랑 많고, 온유하신 성품에 대한 묘사이다.
★ 두 가지 은유(隱喩)로 말씀하고 있다.
(1) 상한 갈대 (2) 꺼져가는 심지
1) 상한 갈대.
(1) 갈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갈대는 약한 것이다. 약한 것의 상징이 갈대이다.
우리 인간은 연약한 갈대처럼 약하다.
인간은 몸도, 마음도, 의지도 다 약한 존재이다.
(사 40:6)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고 했다.
이 말씀도 인생의 무상함을 가르치는 동시에 또한 약함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인생은 마치 풀에 맺힌 아침 이슬 같은 초로인생(草露人生)이다.
이 말도 인생무상(人生無常)과 연약한 인생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후 4:7) 인생은 질그릇과 같다는 말씀도 깨어지기 쉬운 약한 그릇을 말한다.
성경은 인간을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마치, 풀과 같고, 그 영광도 풀의 꽃과 같고, 질그릇처럼 연약한 인생인데,
오늘 말씀에는 인간은 갈대 처럼 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인간이라는 말이다.
(2) 약한 갈대인데, 더 안타까운 것은 상(傷)해 있다.
약한 갈대가 꺾이우고 상처가 있다.
갈대는 짐승이 한번 지나가도 스치거나 밟혀서 상하기 쉽다.
몸과 마음에 상처가 있다.
상처가 심해서 회복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소망이 없어 보인다.
그것이 인간들의 현 주소이다.
이 세상의 천재지변(天災地變), 전쟁과 코로나 19같은 역병과 기근... 등등의
사고로 밟히고 스쳐서, 몸과 마음이 상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누구나 상한 갈대와 같다.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도 상한 갈대이다.
겉으로는 평안한 것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상처없는 사람이 없다.
온갖 유혹과 시험이 많은 세상에서 그 심령이 더럽힐 대로 더럽혀졌고,
인간 관계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상처받아 신음하는 상한 갈대이다.
더욱이 죄의 문제로 상한 심령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문제는 이 세상은 상한 갈대를 돌보지 않는다.
오히려, 꺾어버리고 밟아버리는 것이 이 세상이다.
상한 그릇은 내어 버린다.
병든 짐승은 혼자 죽으라고 내버려두는 세상이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과 같은 세상이다.
생존 경재에서 낙오된 자는 넘어지고, 상처받고, 죽는다.
약한 사람, 없는 사람은 밟아 버리고, 무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냉혹한 현실이다.
(3) 상한 ( 갈대 ) 를 꺾지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신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그 상한 갈대를 회복하여 주시기 위해서 보내셨다 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문둥병자를 깨끗케 해 주셨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고,
앉은뱅이를 걷게 해 주셨고, 소경의 눈을 고쳐 주셨다.
손마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 주셨다. (마 12:9)
뿐만 아니라, 주님은 상한 심령, 죄에 빠져 신음하는 영혼을 치유해 주셨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다.
우리 주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시며,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로하여 주셨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로 인하여 상한 인간을 꺾어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케 하셔서 구원하여 주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가 있었다. (요 8:2-11)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성난 얼굴로 묻는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사랑이 많다“ 는 당신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이 여인은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이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꺾어 버리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뭐라고 쓰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글자를 쓰시고, 다시 머리를 들어보니,
모든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다. (9절)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나도 저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하셨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회복시켜 주셨다.
어느 이른 아침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7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요 21장)
나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던 베드로는 면목이 없다.
그랬던 베드로가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의 얼굴을 대하니 부끄러워 설 수 없다.
상한 갈대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말씀을 묻지 않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다.
믿음을 물었더라면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용기를 물었더라면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결심을 물었더라도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물으셨다.
다른 것은 다 부족하지만,
이 제자 마음 속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3번 묻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회복해서 귀한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갈대로 종이를 만들어 글을 썼다고 한다.
또한,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노래를 불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을 꺾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켜서 귀한 진리의 글을 쓰게 만드시고,
하늘나라의 귀한 찬송을 부르게 만드셨다.
상한 갈대 같은 베드로를 다시 회복해서, 오순절 하루 아침에
3,000명을 불러서 회개시키는 위대한 사도로 만드신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상할 대로 상한 어거스틴 같은 청년을 불러서 회복시키시고,
1,000년간의 기독교 사상을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신학자를 만든 것이다.
진리의 붓으로 만드셨다. 이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오늘 날에도 그렇습니다.
실패와 질병과 죄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상한 인간들에게 찾아오셔서
죄를 사해 주시고, 회복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일군으로 쓰임받게 하신다.
그렇습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찬송하며 예배드리는 것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2) 꺼져가는 심지(등불)를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문 (마 12장)에서는 꺼져가는 심지라고 했고,
이사야 선지자는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했다.
불꽃은 없다. 그러나 불티는 아직 남아 있다. 연기만 난다.
이런 작은 불티를 주님은 멸하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숨결을 불어 주시고,
성령의 기름을 붓고, 은혜의 바람을 불어 주셔서 불꽃을 다시 일으켜 주시고
마침내 큰 빛을 발할 수 있는 등대를 만드신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이 작은 불티는 ( 인간의 양심 )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양심이라는 작은 불티가 남아 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양심은 아주 죽지 않았다.
그 마음 속 어느 구석에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동경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 작은 불티를 일으켜 회개케 하고 새 사람을 만들어 주신다.
예수님 당시 여리고 성에 살던 삭개오 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삭개오는 세리장으로 유명했고, 사람들은 그를 매국자라고 외면했다.
그는 유대인의 돈을 거두어 로마사람에게 받쳤다.
그것도 여러 가지 토색과 불의한 방법을 썼던 탐관오리(貪官汚吏)였다.
돈만 알고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이었다.
소망없는 사람이다. 등불이 꺼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는 말을 듣고
거리로 뛰쳐 나왔다. 그는 키가 작고, 사람들은 많아서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뽕나무 꼭대기에 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삭개오의 마음에 의를 사모하는 작은 불티가 있은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 꺼져 가는 등불을 다시 돋우어서 큰 등불이 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눅 19:9)
그래서 그는 토색한 것은 4배나 갚고,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2) 꺼져가는 심지는 작은 ( 믿음 )을 의미한다.
작은 불티같은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너무 작아서 불을 발하지 못한다. 빛을 발하지도 못한다.
이웃을 위해 봉사도 못한다. 주님을 위해서 무슨 일도 못한다.
불티만 있으니, 연기만 난다.
그 연기는 사람들의 눈만 쓰리게 하여 오히려 방해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작은 믿음을 멸시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멸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돋우어서 빛을 발하게 만드신다는 말씀이다.
한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부탁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 아들을 고쳐 달라고 했지만,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면 불쌍히 여겨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슨 일을 할 수만 있으면...?” 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이 믿음입니까?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 믿음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 때, 아이의 아버지는 “주여 믿습니다. 내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는 작은 불티같은 믿음을 돋우어서 확실한 믿음을 만들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이시다는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했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예언을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다.
의심하던 도마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도마는 없었고, 열 제자만 있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셨다.
도마가 돌아왔을 때, 모든 제자들이 한 목소리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도마는 믿지 않았다.
(요 20:25)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의심했다.
의심하는 불티같이 연약한 믿음이다.
이렇게 의심많은 믿음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약한 믿음을 꺼 버리셨나요? 아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또 다시 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요 20:27)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했다.
의심하는 작은 믿음, 꺼져가는 등불 같은 믿음, 연기 나는 삼대 같은
그 믿음을 돋우어서 튼튼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
그 때부터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루살렘에서만 증거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서 <말 토마스 교회>라고
하는 큰 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이라도 멸시하지 않으신다.
혹시 “나는 도무지 믿음이 너무 적어, 나는 의심이 많아...”
이렇게 작은 믿음을 가졌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주님께로 가까이 나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예배시간 마다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좀 더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좀 더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 의심이 있는 연기나는 작은 믿음이지만,
그 불씨를 돋우어서 점점 불길을 크게 만드시고, 다른 사람에게 까지
그 빛을 미칠 수 있는 큰 믿음의 등대로 삼아 주실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연약한 작은 믿음이라고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좀 의심한다고, 나와는 믿는 것이 좀 다르다고,
혹은 좀 부족한 습관이 있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믿음일수록 잘 돋우어 주어서 튼튼한 믿음을 만들고,
큰 등대가 되도록 기도해 주고, 붙들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상한 갈대를 회복시켜 주시고, 그 꺼져가는 등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 오셨다.
(결 론)
결론적으로 두 가지로 적용해 봅시다.
1) 현재, 나의 형편이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는 아닌가?
그렇다면 사랑과 소망의 주님 앞에 가까이 나와 엎드려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고쳐 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성령의 바람을
불어 다시 인생의 등불을 환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2) 우리 주변에는 낙심하고 절망가운데, 울고 있는 상한 갈대들이 많다.
낙심하여 넘어진 그들을 사랑으로 붙들어 주는 교회와 성도가 됩시다.
이민 교회 안에는 약하고, 상한 갈대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는 갈대와 같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코로나로 힘들고,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인간관계도 힘들어, 마음도, 영혼도 갈대처럼 약한 우리들이 아닌가?
서로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이렇게 상한 갈대를 치유하고 구원해 줄 분이 누구이며?
꺼져가는 인생의 등불을 다시 일으켜 줄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주님 앞으로 더 많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엎드려 은혜와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변을 둘러 보시고, 상한 갈대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임해서, 회복의 은혜, 치유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나타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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