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진정성 (마 7:15-27, 롬 10:13)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두 말씀은 서로 서로 모순처럼 보인다.
로마서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얻는다”고 했는데,
본문에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이 두 말씀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의 진정성(眞正性)여부”이다.
믿는다고 말하고, 입으로는 아무리 주여, 주여 부른다 해도,
진정성이 없으면, 구원 받을 수 없고, 진정성이 있으면 구원 받는다.
그러면, 믿음의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
이것을 구별하는 판별 기준이 무엇인가? (21절)에 답이 있다.
(21절)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行)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내 믿음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인지? 아닌지? 판별되는 기준은 :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그러면서 계속되는 말씀 (22절)을 보자.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날” 이란? 심판의 날, 종말의 날이다.
우리야말로 구원 받은 자가 아닌가?
문제는 그 때 주님의 대답이 무섭다.
(23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이 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것 3가지가 무엇인가?
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②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냈다.
축사(逐邪) :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쫓아내었다.
③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것이다.
이 3가지의 특징은 다 능력적인 것이지, 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문제는 주님과 상관도 없는 사람, 믿음의 진정성도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러한 능력과 권능, 희한한 이적이 가능했는가?
그들은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난해 구절이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 그대로이다.
그들은 주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고, 믿음이 위선적이고, 진정성이 없다.
믿음을 가식적으로 가장한 사람들인데도, 놀라운 것은 :
그들에게서도 이러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격이 아니고, 외적인 능력일 뿐이다.
능력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대단한 재력이 있고, 명예가 있고, 큰 권력이 있다고 해서
주님이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정치적인 것처럼, 종교적으로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으로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
엄청난 군중들을 동원하고, 희한한 능력을 나타내고,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그것이 구원 받았다고 하는 증거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질문이 생긴다.
그들은 진정한 믿음도 아니고, 구원 받은 사람들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그런 능력이 나타나게 허락하셨는가?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그렇게도 하신다는 사실이다.
신앙 인격도 없고, 믿음의 진정성도 없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인들에게도
그런 외형적인 능력이 나타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있다.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이적을 행했더니, 애굽의 술객들도 이적을 행했다.(출 7-8장)
희한한 마술을 행하고, 능력을 행할 때가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증도 아니고,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도 아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귀, 사탄도 이적을 행한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하여 속이는 [혹세무민](惑世誣民) 하는
희한하고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는 종말의 때가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난해구절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진리는
외적인 능력 즉, 정치적이든지, 경제적 능력이든지, 종교적이든지,
그러한 외적인 능력이 구원의 판별 기준이 아니라는 말이다.
★ 그러면, 무엇이 기준(基準)인가?
그 믿음의 진정성과 믿음의 변화된 인격이다.
정말,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생활 속에서 열매로 나타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내 안에 있는 내적인 진정한 믿음은 외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생활 속에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나의 진정한 믿음이 인격 변화의 결과로 나타날 때,
그것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본문 (21-23절)말씀과 (롬 10:13)말씀이 모순이 아니다.
믿음의 진정성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외식적, 가식적, 위선적인 언사(言辭)로 말로만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런 사람은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두 말씀의 의미는 모순이 아니고, 일치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나무와 집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두 그루의 나무가 있다.
하나는 좋은 나무, 하나는 나쁜 나무이다.
외형상으로는 구분할 수 없다.
좋은 인생인지? 나쁜 인생인지? 외형상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20절)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열매]는 속일 수 없다.
(16-19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인생을 나무에 비유해서 외형상으로는 똑같이 보여도,
맺어지는 열매로 그 인생을 알 수 있다.
또한, 인생을 집으로 비유하였다.
두 채의 집이 있다.
두 집이 모두 외견상(外見上)으로는 구분(區分)이 안 된다.
문제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닥칠 때이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은 와르르 무너지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끄떡없이 견고하게 서 있게 된다.
평소에는 모른다.
편안하고 믿음의 시련이 없을 때는 그 사람의 믿음은 알 수 없다.
문제는 믿음의 시련이 닥쳐오고, 환난과 핍박의 비바람이 닥쳐 왔을 때,
그 믿음의 진가(眞價)를 알게 된다.
그 차이가 근본적으로 어디 있는가?
믿음의 진정성이 있는가? 변화된 인격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사는가? 이것이 포인트이다.
이와같이 주님이 산상수훈의 결론을 맺으셨다.
(결 론)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마지막 날에 주님이 모른다고 하시면, 큰 낭패가 아닌가?
나의 믿음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한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부르는 가식(假飾)이나, 위선(僞善)이 아니고,
믿음의 진정성을 가지고 예수 믿고, 변화된 인격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때,
주님이 기뻐하고, 인정해 주시는 믿음이 될 것이다.
과연 나의 믿음은 주님이 보실 때, 어떠할까?
나는 반석 위에 믿음의 집을 건축하는 지혜로운 건축가인가?
아니면, 쉽게, 쉽게 신앙 생활하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미련한 자인가?
나는 어떤 집을 짓고, 어떤 열매를 맺는 나무인가?
이와같은 질문들을 나 스스로에게 진솔하게 물어가면서
진정성이 있는 믿음의 길을 정진(精進)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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