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참 행복 (롬 5:1-8)
★ 사람의 행복과 동물의 행복은 다르다.
동물은 배만 부르면 행복하다.
그러나 사람은 배만 부르면 그 다음의 욕구가 또 있다.
[칼 막스]가 실수한 것이 이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가 부르면 평등하고 평화가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은 가질수록 욕심이 더 커지고, 고민도 더 많아지고, 문제도 더 많다.
★ 3분류의 행복이 있다.
① 동물은 동물 나름대로의 동물적인 욕망이 있고 행복이 있다.
그저 육신만 편안하면 족하다.
② 그러나 인간은 인간적 행복이 있고, 이성적 욕구가 있다.
그래서 성취감, 자존감, 자존심, 명예욕... 이런 것들이 채워져야 한다.
③ 그런가하면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될 때 행복하다.
지금, 병들었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귀에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이니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행복하다. 이 확신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지금, 내가 고생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고,
나를 특별히 사랑해서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깨달아지고, 성령의 감동이 오고, 믿어진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한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화평 : 샬롬, 에이레네, Peace) 이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그 속에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깃들여 있다.
(예) 주기도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없다.) <아버지>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요 20:17)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이 말씀을 잘 보라.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할렐루야!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사셨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이다.
모든 고난과 어려움과 역경은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아는 것이다.
이제 십자가를 지신 후에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하신 말씀이 :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의 절정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축복이란? 바로 이<관계성>의 회복이다.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였던 관계에서 사랑받는 자녀의 관계로 변화된 것이다.
(롬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 (1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받아 의롭다함(Justification)을 받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새로운 <관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살 때,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출세하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이 있다. 이것은 말씀과 성령의 내적 증거로부터 온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갈 4: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욥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긋나지 않고, 화목해야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예화) 기독교의 모습이 다른 종교와 이렇게 다르다고 한다.
불교 : 상가 집과 같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유교 : 제삿집과 같다. 조상만 찾고, 무덤 앞에 엎드려 절한다.
기독교 : 잔치 집과 같다. 그래서 찬양하고 감사하는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신비롭고, 깊은 곳에 있다.
세상이 모르는 비밀스러움이 있다.
이것은 죄와 사망과 율법과 사탄으로부터 해방 받고, 자유하고,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하는 그것에 행복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복이 있다는 말은 행복을 말한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이 무섭지 않다.
심지어 고난을 당할 때에도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허락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사랑의 일환으로 주시는 것이니까,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정립된 자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속에 행복이 있다.
이것은 물질이 많이 생겨서 오는 행복이 아니고, 출세했다고 오는 행복도 아니고,
명예를 얻어서 생기는 행복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오는 것으로 성도가 누리는 행복의 핵심이다.
그래서 본문 (2절) 끝에 [즐거워하느니라]는 말은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2절)
이 은혜가 뭔가? 칼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메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시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다.
달랑 한번 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나를 만드시고 창조하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을 것이다.
교만했으나, 어떤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 졌고,
세상만 알았으나, 어떤 어려움을 통해서 영의 눈이 열렸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나 시련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세밀한가를 알아야 한다.
★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세밀하게 역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
이 은혜가 창조적인 은혜, 절대적인 은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받는 사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내가 허물됨에도 불구하고, 받아주시고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훈련하고 교육하신다. 다시 재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평안(샬롬)이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끗하고 온전하게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평안을 우리에게 주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사랑하는 자녀관계,
이 관계가 분명한 사람은 행복하다.
이 관계 속에 그리스도인의 참 행복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이다. 비밀스러운 행복이다.
★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 하)
<즐거움>을 말할 때, 우리는 보통 과거를 말한다.
옛날에 어쩌구 저쩌구 ∼∼, 내가 이래 봐도 옛날에는 ∼∼ 라고 말한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So What...?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과거가 아니고, 미래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고 했다.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초라해 보이고,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큰 기쁨, 신령한 즐거움이 있다.
(주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이 있다. )
앞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 한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장차 나타날 영광이 현재의 고난을 다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행복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미래 지향적이고, 신령한 비밀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신학자들은 이 영광을 Eternal Now (영원한 현재)라고 말한다.
영원성을 가진 현재이다. 그러니까 신비로운 것이고, 놀라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는 좀 더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왜냐하면? 알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행동이 앞서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다음에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내 생각이 저 앞에 가 있다. 멀리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한다.
[앎으로] 즉, 알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화) 고시 공부하는 사람. 저 앞의 영광을 생각하고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난을 참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예화)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다.:
세상에 그렇게 어지러운 방 처음 보았다.
장롱 거울이 깨져 있고, 방바닥에서 흙이 나온다.
애들이 크레용으로 온 벽을 낙서해 놓았다.
그런데 부인 집사님이 생글 생글 웃는다.
어떻게 이 모양으로 살면서 웃음이 나오나?
부인 집사님의 대답이다.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 아빠가 의사인데요.
그 동안 미국 유학 갔다가 오늘 돌아와요.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이렇게 하고 사는 겁니다.”
여러분! 어때요? 재미있잖아요? 일부러 이렇게 산대요.
이것이 이 부인에게만 있는 행복의 비밀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모른다.
내 마음 속에는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 환난은 인내를 ➡ 인내는 연단을, ➡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연단 (도키메이)] 이라는 말은 성품이라는 말이다.
즉, 인내하는 가운데, 성품을 만든다. 인간을 만든다.
이렇게 반전 될 줄을 앎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환난이 있어도, 그 다음에 있을 영광을 알기 때문에 기뻐하고,
고난이 있어도, 그 다음에 찾아 올 것을 믿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병이 들어도 그 다음에 있을 은혜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감사한다.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앎으로 기뻐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극치이다.
(CF) 이러한 미래가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미래가 꽉 막혔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어요?
부요하면 어떻다는 말인가? 오래 살면 어떻다는 말인가?
미래가 있어야 행복이다.
오직, 성도의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행복이다.
환난의 고통 가운데 이것이 만들어 내는 저 확실한 미래적 작품을 바라보며,
그것을 앎으로 기뻐한다.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잠시 잠깐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난 과거에도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사랑하셨다.
연약한 우리는 앞으로도 또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결 론)
믿음의 사람은 해가 거듭 될수록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몸은 당연히 늙어간다. 그러나 속사람은 성숙해져 간다.
겉사람은 후패하고 노쇠해 가지만, 속사람은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주님 만날 시간이 점점 더 가까와 오기 때문이다.
미숙한 어린이는 현재만 생각한다.
연세 많은 어른은 과거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확실한 약속된 미래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영광스런 미래를 바라보며, 그 미래의 기쁨을 끌어당겨서
오늘도 그 기쁨 속에서 산다.
고난을 당 할수록 더 기뻐하고, 어려움을 당할수록, 그 날이 가까이 온 줄 알고 기뻐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비밀스런 행복이 있다. 이것은 주님과 나만이 아는 것이다.
오늘 말씀(롬 5:1-8)이 너무 귀한 말씀이니, 읽고, 또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신령한 기쁨을 누리며, 내일을 열어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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