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행복 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다.
(롬 8:29, 약 1:2-4, 시 66:10-12)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한다.
과연 인생의 의미가 어디 있는가?
인생의 의미가 행복을 추구하는데 있는가?
아니면, 인격이 연단받아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하는데 있는가?
인생의 의미를 행복 추구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예화) 알렉산더 솔제니친 (러시아의 문호) 1918년 출생 2008년 사망 (만 90세 삶)
197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17년 구쏘련에 혁명이 있었다.
따라서, 솔제니친은 1918년에 태어나 보니 공산주의 사회에서 태어난 것이다.
살아보니까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공산주의 사회, 전제적인 사회는 잘못된 것이다고 생
각되면서 체제 비판적인 인사가 되었다.
KGB가 그것을 알고, 솔제니친을 강제노동 수용소에 감금했다.
후일에 <수용소 군도> 라는 책을 썼다.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 쏘련이 서방으로 추방시켰다.
서방 사회에 와서도 살아보니, 역시 이 서방 사회도 극단적인 인간 중심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을 했다.
서방사회는 자유분방하고, 풍요로운 것 같지만, 너무 너무 극단적인 인간 중심의 사회이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구사회를 비판한 것이다.
그는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해 주셨던 말씀을 했다.
이 세상이 이렇게 고통이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란다.
이 말을 듣고 성장했는데, 실제로 이 두 양 사회를 살아보고 인생을 수십년 경험해 보니까,
내가 어릴 때에 어르신들이 들려 주셨던 말씀이 옳더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에 왜 이렇게 고통과 비극이 많은 것인가?
그 이유를 정리해 보니까, 내가 어릴 때에 어르신들이 해 주셨던 그 말씀보다
더 명확한 이유도 없고 설명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인간에게 고통과 악이 그렇게 많아지게 된 것이다는
말이다.
성경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렘 2: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인간들의 악과 고통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불신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말을 했다.
“당신들이 한번 강제 수용소에 갇혀서 노동을 하는데, 작업반장이 내려치는 곤봉에
한번 맞아보라. 그러면 인생의 의미는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정말 인생에는 질병과 사고도 많고, 고통과 슬픔도 많고, 불행과 비극도 많은데...
이 세상을 사는 의미가 행복의 추구라면 우리는 좌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슬픔과 분노와 절망에 이를 수 밖에 없다.
행복의 파랑새를 좇아가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 그러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환경과 지식과 고난을 통해서 인격이 연단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데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목적도 같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이 아직도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이다.
(약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생의 시련과 고통의 그 의미가 무엇인가?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한 믿음의 시련이 주님을 닮은 온전한 인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롬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정말 이 세상에는 환난이 많다.
그런데 그 환난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뜻이 있고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연단 = Proof character : 입증(立證)된 인격이다.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 그것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고,
환난은 인내를 낳는다. 인내할 줄 아는 인품이 되게 한다.
사람이 전혀 고통도 환난도 당해 본적이 없는 사람은 어디 가서 인내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환난 가운데 인내를 배우고, 인내 속에서 연단을 받고, 연단은 소망을 붙들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는 바, 인생의 의미는 인격이 연단받아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는데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우리 인격과 신앙이 연단 받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받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연단의 도구가 2가지가 있다.
(1) 고난 (2) 말씀이다.
1) 하나님의 연단의 도구는 [고난]이다.
그 고난은 보통 고난이 아니고, 도가니의 풀무불 같은 고난이다.
(10절)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같이 하셨으며
노다지 속에 여러 가지 불순물들이 있어서 도가니에 단련하면 순은이 나온다.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그렇게 단련하신다.
(시 66:10) 우리가 겪는 시련을 통하여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다.
(11절)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가 있다.
내 발이 그물에 걸려서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에 걸려들 때가 있다.
또한, 어려운 짐이 내 허리에 놓일 때가 있다.
참으로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의 무거운 짐이 내 어깨를 누르고 허리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12절)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가장 큰 고통은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다.
사람들이 내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받고, 자존심 상하고,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고, 수치와 굴욕이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정말 불과 물을 통과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와같이 불같은 시련을 통과시키는 것은 우리를 연단하기 위해서 이다.
그것이 전혀 없다면, 인내를 배울 수 없고, 겸손도 배울 수 없다.
항상 모든 일이 잘 되고, 만사형통하기만 한다면 그런 사람의 마음은 겸손을 배울 수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과 고통의 의미는 우리를 낮추시고, 겸손을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본문 (시 66:10-12)에서 4가지 :
1) 내 발이 그물에 걸리고
2) 무거운 짐이 내 허리에 있고
3) 사람들이 내 머리 위를 타고 가고
4) 불과 물을 지나가게 하는 시험과 시련
그러나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것이다.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 고난의 의미는 인격의 연단이다.
(예화) 욥을 생각해 봅시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했던 욥이 정금처럼 단련을 받은 것이다.
2) 또 하나의 연단 도구는 [말씀] 이다.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 안에서 깨달음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욥 23:11-12)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시편 105에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시 105:18-19)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발이 착고에 상하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
하나님이 고난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셨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고통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셔서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고 위로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나를 애굽에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가졌던 통찰력과 관대함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고난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예수님의 순종에 관한 말씀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히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면,
우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결 론)
인생의 의미는 행복 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연단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실 때 사용하는 두 가지 도구는 고통과 말씀이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고난이 때때로 찾아올찌라도,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연단 받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서 참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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