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환희에 찬 죽음 (딤후 4:6-8)
오늘은 [죽음]의 문제를 말씀드리며 은혜받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순교를 앞두고 죽음을 예견(豫見)하고 있다. (6절)
(6절)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오히려 기뻐하고, 죽은 다음에 주어질
영광과 면류관에 대한 기대와 환희에 찬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천국의 소망과 기쁨으로 넘쳐 있다.
얼마나 멋진 노(老)사도의 모습인가?
죽기를 무서워하고 안 죽으려고 용을 쓰는 사람의 모습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우리도 죽음 앞에서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죽음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
Elizabeth Kϋbler-Ross의 연구 조사가 있다.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할 때, 나타나는 반응의 변화를 600명 대상으로 조사했다.
1) Deny 부정(否定)한다. (Oh! No)
그럴 리 없어. 그럴 수 없다. 나는 안 죽는다고 말한다.
혹시, 오진(誤診)이 아닌가? 생각하며, 다른 병원에 가 본다.
문제는 부정해도 거절할 수도 없고, [아니라] 해도 올 것이 온 것뿐이다.
죽음 앞에서 고독을 느끼면서도 계속 부정한다.
마치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온 것처럼 통곡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는 부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가치가 부정되고, 손이 풀어진다.
그러다가 눈을 감고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뿐이다.
2) Anger 분노(忿怒)한다. Why me?
죽어야 할 사람이 많은데, 왜 내가 죽어? 왜 하필이면 나냐?
신경질도 부리고, 화도 내 본다.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나는 죽을 이유가 없다고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가 인생을 1분도 연장시키지는 못한다.
3) Bargaining 타협하는 단계(Stage)로 들어간다.
운명의 신이 그렇게 결정한 것이라면 따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절대자가 내 생의 기간을 정했다면 나는 어쩔 수 없다.
4) Depression 낙심(落心)한다.
인생을 포기하고 좌절과 실의에 빠지고 자기의 생을 돌이켜 보면서
괴로움과 죄책 가운데 죽는다.
죽음을 생각하고 돌이켜 보니, 그래서는 안 될 삶을 살았거든요.
부끄러운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 실망, 자기 불신, 자기 허무에 빠지면서 낙심한다.
그러면서 한숨만 계속 쉬다가 죽어가는 인생이 적지 않다.
5) Acceptance 수락(受諾)한다.
부끄러워도, 잘못되었어도, 이제는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에게 이와 같은 불안한 질문을 한답니다.
“그럼,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하다가 죽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보통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심리적 단계(Stage)는 이와같고, 이렇게 끝이 난다.
여기,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다.
[2] 신앙인의 죽음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어쩌면
그렇게도 여유 있고, 그렇게도 기뻐하고 있을까요?
문자 그대로 기대와 환희에 찬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오히려 기뻐하고, 천국에서 주님이 주실
의의 면류관과 천국의 영광에 대한 기대와 기쁨으로 넘쳐 있다.
그는 오래 전에 천국의 맛을 실제적으로 체험해 본 적이 있었다. (고후 12:1)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2-3)
♬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이 세상 추운 일기가 화창한 봄날 되도다.
영화롭다 낙원이여 이 산 위에서 보오니
먼 바다 건너있는 집 주 예비하신 곳 일세
그 화려하게 지은 것 영원한 내 집이로다.
[3] 이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1) 죽음의 보편성이다. (왕상 2:2)
왜 나냐? (Why Me?) 왜 지금이냐? (Why Now?) 가 아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말하기를 :
(왕상 2: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라.
죽음의 보편성을 말한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떤 모습으로 죽을 것인가?
성도는 성도답게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우리의 기도 제목이다.
2) 3종류의 죽음이 있다. (요 11:25-26, 계 21:8)
① 육적인 죽음 : 영혼과 육체의 분리.
사람이 죽는다는 말은 영혼이 몸에서 떠나 분리되는 것이다.
② 영적인 죽음 : 하나님과의 분리.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말한다. (창 2:17)
③ 영원한 죽음 : 하나님과 영원한 분리.
영원토록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계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두번 죽고, 두번 태어나면 한번 죽는다.
(이 말을 이해 하시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3)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계 14:13) 저희가 수고를 그치고 쉬리라고 했다.
경주자에게 골인 지점이 없다면 비참하다.
인생은 고달프다. 그러나 죽음은 편안하다. 안식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죽음이란? 큰 축복이다.
♬ 후일에 석양 가까와 서산에 해가 질 때에
주께서 쉬라 하실 때 영원한 안식 얻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내 주 예수 뵈올 때에 그 은혜 찬송하겠네
4) 이 세상에서의 끝은 천국 생활의 시작이다.
이 세상과 저 천국과 연결되는 관문이 죽음이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은 천국 생활의 시작이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성도라고 안 죽는 것이 아니다. 성도로서 성도답게 죽는 것이다.
두려움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죽고 천국을 바라보며
부활을 소망하며 눈을 감는 것이다.
5)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언제까지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아내와 남편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가까운 친구나 이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죽음이 찾아올 때가 있음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특별히 그들이 예수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했으면, 불과 유황이
타는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니, 복음을 전해서 구원해야 한다.
6) 주님이 주실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8절)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받아쓰리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면류관 받으리
저 요단강 건너 우리 싸움 마치는 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 주가 내게 부탁하신 모든 역사 마친 후
예비 하신 그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빛난 하늘 그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 없는 영광 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 바울은 죽음 앞에서 자신의 생애를 3가지로 요약했다.
①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았고,
②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③ 믿음을 지켰다고 했다.
참으로 훌륭하게 잘 산 인생이다. 부럽다.
바울은 천국에 들어가, 주님이 주실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기대와 환희에 가득찬, 행복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 론)
지혜자는 죽음을 생각하고, 항상 깨어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며 산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있다고 했다.(전 7:1)
인생의 출발점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종착점이 있다.
시작이 있었으니 마지막도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죽는다는 것]을 부정하겠습니까?
문제는 끝이 있음을 종종 잊고 사는데 문제가 있다.
내 인생의 출발이 내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닌 것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느 시간에 부르시든지 간에 그 시간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끝 있음을 안다고 하여 미리 죽는 것은 아니다.
끝이 있음을 알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며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저 좋은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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