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인가? 은혜인가?
(롬 8:1-6, 롬 3:20, 롬 7:7, 요일 4:8)
율법과 은혜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율법의 위치, 율법의 의미, 율법에 대한 이해,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
이것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율법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딤저 1:8)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그렇습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나쁜 것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는 같은 것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 구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권위(權威)는 좋은 것이고, 권위가 있어야 한다.
부모님의 권위, 스승의 권위, 국가의 권위는 필요하다.
권위가 무너지면 존경심도 없어지고, 무질서하게 된다.
그러나 권위주의(權威主義) Authoritarianism 는 좋은 것이 아니다.
물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물질주의는 좋은 것이 아니다.
향락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처럼, ~~주의(主義)는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주의(主義)에 빠지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게 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율법주의는 좋은 것이 아니다.
★ 무엇이 [율법주의] 인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겠다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의 힘으로 의(義)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의(義)에 도달하지 못하고,
율법 아래서 정죄감과 죄책감을 받으며 심판이 두렵고, 평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한다.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의 큰 잘못이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이 왜 율법은 주셨는가?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주신 계명이다.
문제는 율법이 좋은 것이지만, 율법에는 한계가 있다.
율법은 성격상 의로운 것이지만,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줄 뿐이다.
(롬 7:7)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탐내지 말라고 하는 계명이 없으면 탐심도 모르고,
죄도 알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는 해 주지만, 죄를 벗어나게는 못한다.
(롬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효용성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효력이 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 육신 때문이다.
육신(肉身)이란? Flesh 우리 몸의 살과 뼈이다.
그런데, 이것이 영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
예수 믿기 전의 모든 [옛 성품의 집합체] 를 말한다.
타락한 인간 욕심의 저장소가 육신(肉身)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주신 선한 것이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육신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셨다.
이 성경 구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그에게 온 세상의 죄값을
치루게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생명의 피를 흘리게 하여,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사랑이다.
(요일 4: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러므로,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이다. (롬 8:3-4)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서 살게 되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내가 율법 아래 있으면, 죄책감과 정죄감에 시달리게 되지만,
은혜 아래 있으면,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다.
죄가 나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4절)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는 것인데, 그것을 내 힘으로는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좇아 살면 율법의 요구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요.
(5절)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지만,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님의 일을 생각합니다.(현대인의 성경)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성령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을 따라 사는 삶은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 같은 것이다.(롬 13:13)
승리의 비결이 여기 있다.
(갈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 안에는 검은 개와 흰 개이 살고 있다.
검은 개는 육신의 소욕이고, 흰 개는 성령의 소욕이다.
이 둘이 항상 싸운다. 누가 이기는가?
내가 누구에게 먹이를 주는가에 달려 있다.
검은 개가 좋아하는 먹이, 방탕, 술 취함, 음란, 호색, 쟁투, 시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같은 먹이를 주면, 검은 개가 힘을 얻어 이기고,
흰 개가 좋아하는 말씀, 기도, 찬양, 사랑, 용서, 화목, 섬김, 성결, 거룩함 같은
먹이를 주면 흰 개가 힘을 얻어 이긴다.
나는 어떤 먹이는 누구에게 더 많이 주는가?
우리가 성령의 인도 아래서 살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승리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된다.
비행기가 구름 아래서 날아가면, 비가 내릴 때는 비를 맞는다.
그러나 구름 위에서 날아가면, 폭우가 쏟아져도 한 방울도 안 맞는다.
우리는 율법의 구름을 넘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
(결 론)
율법은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나쁜 것이다.
내 힘으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십자가에서 생명의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온 인류의 죄 값을,
[테텔레스타이] 하여 다 갚아 주셨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서 사는 자들이다.
따라서, 타락한 욕심의 저장소인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생명과 평안을 얻고 누리게 된다.
율법에 매여 정죄감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서, 성령님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생명과 평안의 삶을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주가 예비하신 저 좋은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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