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7일 토요일

믿음과 율법의 관계 / 마 5:17-20.

 믿음율법의 관계 (마 5:17-20)

그리스도인의 율법의 관계는 어떠한가?

아주 밀접한 관계인가? 아니면, 무관한 관계인가?

[율법관]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잘못된 양극단적인 이해가 있다.

1) 율법주의 :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갖고 있었던 율법관이다.

모든 것율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2) 반(反)율법주의 :

반율법주의는 문자 그대로 율법이 필요없다는 율법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그들은 은혜자유를 말하는데, 도덕폐기론과 상통한다.

은혜로 구원받고 자유인이 되었으니, 자유롭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유방임주의에 흘러서 자유가 방임방탕으로 떨어지게 한다.

그러니까, 율법주의도 문제이고, 반율법주의도 문제이다.

율법주의행동만으로 치장하게 되어 위선적인이 된다.

마음이 율법의 정신과 상관없는 왜곡적인 삶을 산다.

그런가 하면, 반율법주의방탕타락으로 전락시킨다.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에 경도(傾倒)되었던 바리새인서기관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볼 때, 정말 수상스럽게 보였다.

예수반율법주의를 지향(志向)하고 있는 자가 아닌가? 라고 이해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생각해 볼 때,

자신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율법폐기하러 온 자가 아닌가?

그들은 예수님율법폐기론자, 율법배격자, 율법무용론자곡해(曲解)했다.

사도 바울도 똑 같은 공격을 받았다.

율법주의자들이 볼 때, 사도 바울도 반율법주의자로 오해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대답하신 것이다. 즉, 믿음율법관계를 설명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위치는 어떠한가?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 율법의 의미, 율법의 핵심을 밝히시고,

그것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했다.

(롬 3:31)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굳게 세우느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증거가 똑 같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 (17절)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율법주의에 경도되어도 안되고,

반율법주의에 치우쳐도 안 된다.

율법의 핵심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

★ 율법의 정신은 무엇인가?

(마 23:23)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인(仁)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현대인의 성경) 율법 가운데 더 중요한 정의자비믿음은 저버렸다.

율법의 정신의(義)인(仁)신(信)이다. 즉, 정의긍휼믿음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6가지 예를 들면서 말씀하셨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미워만했어도 이미 살인한 것이다고 하셨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기만해도 간음한 것이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을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해석은 바리새인들의 의(義)보다 훨씬 높은 표준의

의(義)를 드러내신 것이다.

(20절)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의 의(義)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義)이다.

우리가 어떻게 바리새인들의 의(義)보다 더 나을 수 있겠는가?

바리새인의 삶이 얼마나 율법에 충실한지 모른다.

(눅 18:11-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온다.

바리새인은 :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세리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의 평가 :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그렇습니다.

의롭다함을 이루었다가 아니고,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하셨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義)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성취하고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20절)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혹시라도 오해해서 아니, 내가 어떻게 바리새인보다 더 나을 수 있는가?

나는 천국에 못 들어가겠구나...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의(義)다른 성격의 의(義)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했다.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 이 말씀에 두 종류의(義)가 나온다.

①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 (21절)

②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義) (22절)

하나님의 의(義)는 :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아니다. 우리에게서 나오거나 이루는 의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오는 의(義)다.

하나님의 의(義)를 받는 통로는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행위성취하거나, 도달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로서의 의(義)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빌 3:9)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義)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

이 말씀에도 율법의 의(義)가 있고, 믿음의 의(義)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증거를 받은 것이다. 돌발적이거나, 우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의(義)하나님의 선물이고,

그것을 받는 통로믿음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는 의(義)믿음으로 받아 들이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가 되신다.

★ 이것이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이신득의 (以信得義) Justification by faith 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롭게 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의(義)구현(具現)되고, 실현(實現)되도록 해야 한다.

구원받은 자의 인격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고, 목표이다.

(결 론)

믿음율법관계가 어떠한가?

우리는 율법주의자도 아니고, 반(反)율법주의자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의(義)도 없고, 구원 받을 만한 공로도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도 훨씬 나은 하나님의 의(義)선물로 받았다.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와 십자가의 공로로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허물 투성이인 나를 의롭다

칭의(稱義)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른 복은 못 받았다할 찌라도 이 한가지만으로도 영원토록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제, 하나님의 의(義)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믿음으로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의 생활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의의 열매(빌 1:11)를 맺으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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