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생명 (요 11:17-27, 고전 15:51-58)
내가 사당동 총회 신학대학원 다닐 때였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弑害) 당해 돌아가셨다.
그 때 내가 생각한 것은 이것이다
정말 죽음 앞에서는 지식, 학위, 부, 명예, 권력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는 하찮은 것이다.
다 공중분해 되고 만다. 다 초라해진다. 이것이 인생(人生)이다.
우리는 잠시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Power Pause 권력 중지” (존 하리차) <행복 멈춤>으로 번역 된 책에서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두려움]이라고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두려움들이 있다.
가난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인간관계의 두려움 등등 있다.
문제는 그 사건 자체보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나를 더 괴롭힌다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서 죽은 사람들보다, 전쟁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인간이 갖는 두려움 가운데 가장 무서운 두려움은 죽음이다.
모든 생활의 두려움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다.
병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음>은 반드시 찾아온다.
죽음은 공평하다.
부자에게도 찾아오고, 가난한 자에게도 찾아온다.
권력자에게도 임하고, 힘 없는 자에게도 임한다.
학박사에게도 찾아오고, 무식자에게도 찾아온다.
문제는 안 죽을 것처럼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고 사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 다음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음]에 대한 무서운 철학이 있다.
(1) 죽으면 끝이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생각이다.
나 하나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고 자살한다.
집단 자살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는 착각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2) 죽이면 끝이다.
이것은 죽으면이 아니라, 죽이면이다. 살인이다. 살해이다.
저 미운 인간, 저 웬수, 죽이면 끝이다는 생각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것이다 .
구쏘련이 무너지기 전에 1년에 100만명을 숙청했다고 한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랬다. 그러나 무너지고 말았다.
힛틀러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수 많은 유대인들을 죽였다.
죽이면 해결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서운 생각이다.
도스토엡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문학 작품이 말하는 핵심은 :
사람을 죽여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대 제사장, 가야바가 이렇게 말한다.
(요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이 의인이냐? 아니냐? 그리스도냐? 아니냐? 에는 관심이 없다.
이 사람 죽여 버리면 민란도 안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냐? 는 말이다.
이것이 가야바의 철학이다.
그러니까 죽으면 끝이고, 죽여서 끝이다는 생각은 가장 위험한 생각이다.
문제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내가 죽어서 해결 안 되고, 또한 그 인간 죽인다고 해결 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깨닫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 본문에는 3가지 생명의 원리가 나온다.
1) 부활 생명이 있느냐?
2)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
3) 예수님을 믿는 자는 너도 부활한다.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들이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사로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라고 했다. (3절)
그런데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주님이 사랑하는 자인데 병이 듭니까?
그 이유를 주님이 말씀하신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너무 너무 귀한 말씀이다.
건강해야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병들었으나 이것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이다.
살았으면 산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다.
질병도 있고, 죽음도 있으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 뿐이다.
나사로의 죽을 병 앞에서 절망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하기 위한 사건이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간다는데 빨리 가시지 않고 2틀을 더 머무셨다.(6절)
이것도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다.
오히려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1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셨다.
무슨 말인가?
만일 나사로가 죽기 전에 가셨더라면, 나사로의 병을 고쳐 주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좀 더 아퍼라. 그리고 죽어라.
그리고,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함을 기뻐하노라.
큰 병에 걸림 ➡ 죽어라 ➡ 장례식 ➡ 3일 지났으니, 시신(屍身)이 부패되라.
왜냐하면? 부활이 있으니까, 다시 살아날 것이니까,
장례식도 하고, 썩은 냄새가 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의 귀한 부활 생명의 능력이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사로가 병나고 죽는 것이 기쁜 일이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수록 은혜가 된다.
★ 생명에는 4가지가 있다.
1) 식물적 생명 :
생명은 신비하다. 겨울에 다 죽은 것 같다.
나무 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 뿐이다.
그런데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다시 솟아난다. 씨앗의 생명력이 있다.
2) 동물적 생명 :
육체의 생명이다. 동물은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다.
3) 인간적 생명 :
인간은 동물적 생명 그 위에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생명이 있다.
여기까지는 다 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생명이 있다.
4)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즉, 부활의 생명이다. 신비로운 영체(靈體)로서의 생명이다.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부활의 생명은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문을 열어 주셨다.
내가 변화 될 부활을 첫 열매로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죽음, 내 죽음이고,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이다.
★ 성경에는 부활과 변화를 같이 사용했다.
(고전 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내가 부활이니, 나를 믿는 자는 재림의 날에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광이고, 미래의 소망이다.
(벧전 1:3)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부활은 이론이 아니다. 도덕적 결론이 아니다. 어떤 개념이 아니다.
역사적 실제 사건이다.
중요한 것은 이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을 신앙적 사건으로 내가 믿을 때,
주님의 부활이 내 것이 된다.
그러나 안 믿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 나의 사건이 되고 나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 칼빈은 신앙의 3단계를 말했다.
1) 지적 신앙 :
진리를 알아야 한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 영적 지식을얻는다.
이것을 박윤선목사님은 계시 의존 사색이라고 하셨다.
2) 체험적 단계 :
신앙은 체험이고 간증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한다.
3) 헌신적 단계 :
부활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다.
영원한 생명을 믿기에 순교까지도 할 수 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낙심하지 않는다.
부활을 믿기에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 승리할 수 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부활 신앙이 있는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되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렇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전도, 봉사, 헌신이 다 헛되다고 했다. (고전 15:14)
미래에 대한 보장만 확실히 있으면 문제 없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약속하셨다.
(마 28:20)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을 붙잡고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사역을 승리하며 잘 감당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
(결 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죽음>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 모든 신자들의 산 소망이 되셨다.
부활의 소망을 갖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
부활 신앙으로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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