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없는 무화과 나무. (눅 13:6-9)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다.
봄에 농부가 씨를 뿌릴 때는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 씨를 뿌린다.
오늘 본문에는 무화과나무가 나온다.
무화과 나무는 특징이 있다.
1) 관상용 나무가 아니다. (보기 좋으라고 있는 나무도 있으나)
2) 재목용 나무도 아니다. - 굵고 튼튼하게 자라지 않는다.
3) 아름다운 꽃도 없고, 향기도 없다.
4) 수고하지 않아도 잘 자라나는 나무이다.
이와 같이 무화과나무는 멋도 없다. 향기도 없다. 관상수도 아니다.
그러면 이 나무는 왜 존재하는가? 한 가지 이유이다.
오직, 열매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무다.
이것이 무화과나무을 만드신 창조의 목적이다.
무화과나무 열매는 익기 전에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이고, 열매도 많이 맺는다.
이 나무의 존재 목적은 오직 한가지, 열매 맺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생태학에서 필요없는 존재는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신비롭고 기묘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도 많이 잡아먹고 죽여서 생태계가 파손되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목적이 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배워야 할 교훈과 진리가 있다.
1) 모든 것에는 존재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드신 것이다.
“나는 아무 쓸데없는 인간이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드셨다.
이 세상에는 우연이 없다. 필연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존재의 목적이 있다.
마른 풀도, 조갯돌도 ... 다 가치와 목적이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저와 여러분)이랴?
누구도 불(不)필요한 사람은 없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있다. 모든 존재는 목적이 있다.
그런데 존재의 목적이 존재 가치를 결정한다.
(예) 지금 제 앞에 마이크가 있다. 설교할 때마다 참으로 고맙다.
그런데 이 마이크가 댄스 홀의 마이크 와 교회의 마이크를 놓고 비교해 볼 때,
어떻게 쓰임 받느냐? 에 따라서 가치가 떨어지기도 하고, 올라가기도 한다.
(예) 사도 바울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입었다.
그 이유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라는 확신이 있었다.
자기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짐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깨달았다.
맞다 맞어, 이것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것이고, 내가 사는 것이다.
이 순간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애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존재 목적을 깨달을 때 여기에 행복이 있다. 삶의 의미도 있다.
내 인생의 존재 목적을 깨닫는 것을 사명감이라고 한다.
그 사명감을 깨닫는 날이 제 2의 생일이다고 한다. (틸릭히)
2) 하나님은 우리가 무화과나무처럼 열매 맺기를 원하신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물을 주면서 수고한다.
목적은 열매를 걷우기 위해서이다.
풍성한 열매를 바라보니, 결코 수고가 낭비가 아니다. 고생이 고생이 아니다.
본문에 무화과나무는 열매 맺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나무인데,
주인은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없지만 찍어 버리지 않고 3년을 기다렸다.
참고 인내해 주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다림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아야 한다. 인격적인 기다림이다.
기계적이거나 억지로 기다린 것이 아니다.
따뜻한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물주고, 거름을 주면서 기다리셨다.
문제는 (7절) 어찌하여 땅만 버리느냐?
이 말은 인내의 한계를 말한다. 어느 순간에 심판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도 인내의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언제까지나,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시 전에 깨닫게 하신다. 즉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어떤 때는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깨닫게 하신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게 하면서 깨닫게 하신다.
때로는 주시기도 하시고 걷우어 가시기도 하시면서 깨닫게 하신다.
하나님의 인내는 무한하다. 끝없이 참으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인내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가 인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하면, 하나님의 인내도 끝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에 대해서는 3년이라는 한계가 있다.
3년 후에는 찍어버리리라고 했다. 심판할 것이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에게 주시는 말이다.
탕자가 집을 나갔으나, 참고 기다려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를 악하게 이용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역이용하는 자에게는 안 참으신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갈 6:7)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할 때, 하나님도 참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질 때 심판하신다.
노아 홍수 사건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사건이 이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오래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어떤 때는 못 참으시고 분노하신다.
어떤 때 하나님은 참지 않으시고 분노하시던가요?
하나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다.
(예)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긴다.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급에서 인도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큰 도전이다.
하나님을 우상화했을 때 이것이 인내의 한계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십자가가 하나님 인내의 한계임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죄 지은 인간을 향한 마지막 통첩이다.
종말론적인 복음의 멧세지이다.
무화과 나무을 향해서는 3년 동안 기다리며 물 주고 돌보았으나,
더 이상은 인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모르고, 은혜를 깨닫고도 곁길로 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게 될 것이다.
(예) 포도원 농부 비유를 보면, 종들을 죽이더니, 상속자니 이 아들까지 죽였다.
이것이 인내의 한계이다.
하나님은 사랑도 있으시나, 하나님의 심판도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이 비유 안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 있다.
즉, 과원지기의 중보적 역할(役割)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이 시간에 과원지기가 나선다.
나무는 말을 못하지만, 과원지기가 나서서 말한다. (8절)
여기의 과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금년 한해만 더 참아 주소서. 한번만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역할을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과 사람의 멸망사이에 서서 중보적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주인은 하나님이요, 과원지기는 예수님, 무화과 나무는 우리들이다.
만일 과원지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화과 나무는 찍혀 버렸을 것이다.
과원지기는 내가 거름을 주고 다시 돌볼 테니 1년만 더 참아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내 책임입니다. 제가 다시 돌보겠습니다.
내가 책임 지겠습니다고 하는 것이다.
★ 과원지기가 변호하며, 말하는 3가지 책임의 원리 :
1) 무화과 나무에 대한 믿음이 있다.
지금은 열매가 없지만, 앞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는 믿음이다.
병(Disease)과 장애(Disorder)는 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병자와 장애자는 다르다.
병(Disease)은 나을 수 있다. 치료가 된다.
그러나 장애(Disorder)는 고칠 수 없다. 장애 상태로 멈추어 있는 것이다.
과원지기는 무화과나무의 문제를 장애가 아니고 병으로 보는 것이다.
즉,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고칠 수 있다. 열매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 우리가 말할 때, “항상” 이란 말을 빼야 행복할 수 있다.
남편이 늦게 집에 오면, 오늘 늦으셨네요? 어쩌다 늦었군요 라고 말해야지,
당신은 왜 항상 늦어요? 당신 아버지도 그랬다면서 ...
Accident로 보아야지 항상 그렇다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시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예) 예수님은 18년 동안이나 귀신 들린 여인의 가능성을 보고 아브라함의 딸이니라.
귀신만 나가면 문제 없다. 가능성을 보신 것이다.
2) 열매 없는 이유는 내 책임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주인님, 제가 잘 보살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책임을 나무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는 모습이다.
과원지기가 한번이라도 이렇게 말을 하지 않는다.
“이 나무는 아주 못쓸 나무입니다. 본래, 이렇게 나쁜 나무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인님, 제가 잘 돌보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고 책임을 지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예) 스티브 코비의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법칙”에서 말하는 성공의 법칙은
첫째가 주도성이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자세이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화내는 것이아니라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책임을 환경에 돌리지 않는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다. 내가 선택한고 내가 책임지겠다.
나는 하기 싫은데 저 사람 때문에이라고 한다면 나의 존재는 없어진다.
그러므로 성공의 비결은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다고 스티브 코비의 주장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것까지도 책임지는 것이다.
(예) (출 33장)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겠다고 하셨다.
그 때 모세가 내 생명도 함께 생명책에서 제하여 주세요.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예) 부부가 싸운다. 내가 당신하고 살면서 이렇게 되었다고 이렇게 원망하는 순간,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남 핑게 대지 말고, 내가 책임지는 것이다.
남의 책임까지도 내가 지는 것이 인생이 커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책임지고 죽으신 것이다.
과원지기의 마음이 십자가의 마음이다.
3) 한번만 더 참으시고 마지막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제가 또 다시 최선을 다해 정성껏 돌보겠사오니, “주인님 ! 참아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
이 과원지기로 인해서 다시 한번 무화과나무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얼마나 소중한 기회이고, 은혜인가?
모르긴 해도 1년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고 본다.
(결 론)
모든 존재는 존재 목적이 있다.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악인도 필요하다.
(잠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 목적이 있어서 인생을 살아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를 향하여 기대를 걸고 참고, 변화되기를 바라고, 열매 맺기를 바라신다.
금년도 벌써 추수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금년에는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열매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목적이 분명히 있다.
나를 부러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바르게 응답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저 좋은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