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존엄성(dignity)은 무엇인가?
(요 1:12, 겔 36:26-28, 고후 6:17-18)
인간은 피조물이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dignity(존엄성, 존귀함)의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Man as the son of God)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존귀함” 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복은 받지 못했다 할 찌라도,
이 복을 받았다면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요 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특권)를 주셨느니라.
(겔 36:27-28)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넣어 주어 너희가 내 법을 따르고
내 명령을 준수하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 살 것이며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다.
(고후 6:18)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 자신도 친히 성부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막 14:36)
우리들도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갈 4:6, 롬 8:15)
(예화) 대학생 연합 수련회가 있었다.
그 수련회에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대학생이 선배들의 권유로 따라왔다.
4박 5일을 지내는 동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처음이다.
왜 저들은 저렇게 좋아할까? 저 사람들은 눈 감고 뭐라고 기도하나?
찬송도, 기도도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말씀도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수련회 마지막 날에 마음이 움직여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은혜를 받게 하신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간증했다.
“내가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게 되었다”는
간증이다. 이 말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느니라.
갈라디아서에서는 수동태로 되어있다.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부르고 싶어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내 생각이 어떠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성경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라고 증거하신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렇다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신학자 하르낙은 말하기를 :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믿는 이웃은 나의 형제, 자매로 여기는 자들이라고 했다.
(요 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특권)를 주셨으니...
(고후 6:18)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라요?
그렇습니다.
위에 말씀 드린대로, 그것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시게 된 것이고,
하나님을 내 기업으로 받게 된 것이다.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지고(至高)의 dignity(존엄성, 존귀함)의 복은 :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존귀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생명, 즉 영생을 부여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신분의식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신분이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신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땅에 속한 자가 ➡ 하늘에 속한 자로,
육신에 속한 자가 ➡ 영에 속한 자로
사망에 속한 자가 ➡ 새 생명을 얻은 자로 바뀐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축복인가?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고후 6:18)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 그런데 여기서 알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은 인자하신 하나님인신가?
무섭고 엄위하신 하나님인가? 하는 문제이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하나님에게는 인자(어질 仁인, 사랑할 慈위) 와 엄위(엄할 嚴엄, 위엄 威위)가 함께 있다.
인자하심과 동시에 엄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양대 속성에서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양대 속성은 <사랑과 공의>이다.
사랑은 인자하신 하나님의 모습과 공의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삼위일체 되시는 예수님 안에도 이 두 가지가 충만하셨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랑과 공의, 인자와 엄위, 은혜와 진리 :
이것이 하나님의 양대 속성을 말해 준다.
(고후 6:16-17)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따로 나와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 손으로만 만지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도 만질 수 있고, 마음으로도 만진다.
손과 눈과 귀와 입술과 마음으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인자와 엄위를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무엇으로 먼저 대하실까요?
인자함 일까요? 아니면 엄위함 일까요?
하나님은 항상 인자하심으로, 먼저 대해 주신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시 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
다윗이 드리는 이 기도에서 인자와 진실함이 앞서 행하신다고 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자함으로 우리를 대해 주시고 받아 주신다.
그리고 변화시켜 주셔서 공의와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주신다.
분명히 기억하세요.
우리 하나님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다.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예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탕자 비유가 있다. (눅 15장)
두 형제가 있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해서, 돈을 채경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모든 유산을 다 탕진하고, 어떤 집에서 종살이 하면서
돼기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살았다.
그렇게 고생하는 가운데 아버지 집이 생각났다.
그래서 일어나 돌이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
아직 상거가 먼데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혀 주고, 신발을 신켜 주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설했다.
그 아버지가 못 돼먹은 탕자를 반겨 주고, 받아 주셨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
인자하시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고 싶으신 것이다.
이 탕자 비유에서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이 아니라,
인자하신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 용서하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다.
(예화) 한 아들이 죄를 짓고, 옥살이를 하고 형을 마칠 무렵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 제가 몇 날, 몇 칠에 버스를 타고 아버지 집을 지나가게 될 것인데,
아버지께서 나를 받아 주신다면 집 앞에 있는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하나 달아 주세요.
만일, 받지 않으시겠다면, 아무 것도 달지 않아도 됩니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집으로 지나게 되었다.
이 아들은 인생을 자책하면서 참회의 눈물이 난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창 밖에 풍경을 바라보면서 집에 거의 가까이 왔을 때,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과연 그 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달려 있을까? 눈물 고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나무에는 노란 손수건이 하나가 아니라, 나무 전체에 노란 손수건으로
덮여 있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만 달아 놓으면 혹시라도 못 보고 지나갈까 봐서 나무 전체에 온통 노란 손수건을
달았다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 아버지는 인자하신 아버지, 은혜의 아버지,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어떤 죄인이라고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느니라.
여기 계신 남자 어른들은 아버지일 것이다.
그런데 전에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계셨고, 지금은 자녀들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한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못하는 것이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아버지를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버지 상은 가부장적인 문화권에서 형성된 아버지 상이다.
엄하신 아버지, 엄격한 아버지, 강력한 아버지, 호통치는 아버지 상으로 고정되어 있다.
한국적 아버지란? 강력한 아버지, 엄격한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무엇이 정말 강력한 것인가? <인자>하고 <온유>한 것이 강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정말 존경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정말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또한, 정말 성품이 인자한 사람들을 대하면 존경심이 생긴다.
어쩌면 저렇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저렇게 인자하게 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 무엇이 강한 것일까요?
온유하고 인자한 것이 강한 것이다.
나 자신의 연약함과 취약성을 토로할 필요가 있다.
만일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자녀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존경받는 남편이 될 것이다.)
인자함이 강한 것이고, 인자함이 존경스러운 것이고, 인자함이 오래 남을 것이다.
(렘 31:3)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결 론)
인간은 피조물이고, 죄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과 존엄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의 존귀라는 사실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아버지이신가?
하나님에게는 [사랑과 공의]라는 양대 속성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다.
(시 136: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인자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살아 온 것처럼, 우리 가정의 아버지들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처럼 인자한 아버지가 될 때,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은 최고의 존엄성을 얻어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게 인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 온 것처럼,
우리 모든 아버지들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인자(仁慈)하고, 자애(慈愛)로운
아버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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