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6일 화요일

두 종류의 삶의 방식 / 갈 5:16-24.

두 종류의 삶의 방식 (갈 5:16-24)

[소제목: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한국 역사에는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왕조(1388년)가 있었고, 그 전에는 고려가 있었다.

쓰러져 가는 고려 말기 때, 이방원이라는 사람이 고려의 마지막 충신과 같은 존경받는

문관 정몽주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말했던 유명한 시가 있다.

‘하여가(何如歌)’라고 한다.

(이 시는 조선 건국의 주도적 역할을 했고 뒤에 조선 태종이 된 태조 이성계다섯째 아들 이방원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이 혁명 전야에 고려의 중추적인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지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떠냐?

이 말은 고려 왕조를 섬기면 어떻고 조선을 섬기면 어떠냐?

그렇게 말면서 정몽주의 의사를 떠보기 위해 운(韻)을 띄운 것이다.

그리고 서로 얽혀 있는 드렁칡에 비유해서 그처럼 아무렇게나 살면 어떠냐고 강조하고,

직접적으로 회유유혹의 말을 했다.

이에 대하여 충신 정몽주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소위 ‘단심가(丹心歌)" 라고 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고려 왕조에 대한 자신의 굳은 절개가 변함없을 것임을 드러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님(공양왕)에 대한 절개를 지켰지만,

역사적 현실은 그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일이 거부당하자 이방원은 심복 조영규를 시켜서

선죽교 위로 지나가는 것을 알고 철퇴로 죽이고 말았던 것이 역사의 현실이었다.

1) 두 종류의 삶의 태도

‘하여가’‘단심가’는 우리 삶의 두 가지 태도를 보여주는, 두 종류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가) 사탄은 이방원처럼 ‘하여가(何如歌)’로 우리를 유혹한다.

인생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들 어떠하리. 뭐 그렇게 절개를 지키느라고 애쓰며 사는가?

고집부리지 말고 좋은 게 좋은 게가 아닌가?

나) 그러나, 또 하나는 정몽주처럼 ‘단심가’(丹心歌)"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있다.

네가 가진 신앙의 지조를 지켜라.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오직 님 향한 일편단심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위하여 살아라.

진리를 향해 걸어가라. 말씀대로 살아라. 죽도록 충성하라.

이렇게 신앙 절개를 지키며 살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방원 같은 유혹이 있다.

사탄의 유혹이 항상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던지 잡지를 보든지 인터넷을 키든지 우리 주변에는 너무 많은 유혹들이 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욕심, 내 육신과 쾌락을 위해서 살아라.

인생은 짧은 것이다. 네 눈이 원하는 대로 살아라. 즐기고 노는 것이 인생의 기준이다.

이렇게 산들 어떠하리? 저렇게 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히듯이 세상의 재미쾌락을 누리며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2)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두 가지가 있듯이,

내 안에도 두 종류의 내가 존재한다.

그래서 서로 갈등하며 싸운다.

하나는 옛 사람을 따라 살고자 하는 내가 있고,

또 하나는 성령을 좇아 살아가고자 하는 거듭난 내가 있다.

새사람을 입은 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이다.

성령님은 말씀한다. 너는 인생이 한번 뿐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 세월을 아껴라. 헛된 일에 분요하지 말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네 몸을 받쳐라. 보람된 삶을 창조하며 살아라.

사명을 따라서 살아라.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라.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

백골이 진토되어도 네 생명, 주님을 위해서 드려라.

(17절): 육체의 소욕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엡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예수 믿으면 옛 사람, 옛 성품, 옛 풍속을 벗어버리라고 한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내 안에 두 종류의 내가 존재하여, 세상을 좋아하는 나와 거룩하고 영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가 내 속에서 날마다 싸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내면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날 때 누가 승리하는가?

거듭난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이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삶을 살 때가 많다.

사도바울도 이 문제 앞에서 괴로워했다.

(롬 7:19, 24) 내가 원하는 선을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갈등에서 이길 수 있는가?

승리의 비결이 여기 있다.

3) 성령을 좇아 행하라. (16절)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패배자가 되지 말고, 승리자가 되라는 것이다.

승리의 길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라.

(16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성령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며 승리자의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성령을 좇아 행하기 위해서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다.

옛 자아를 온전히 죽여야 한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쉽게 말하면 죽으면 산다는 진리이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죽이는 것이다.

옛 사람이 죽을 때 우리는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두 자아(自我)동시에 살아서는 순종할 수 없다.

(예화) 세례를 받는다.

물로 세례나 침례를 받을 때 옛 사람죽고, 새롭게 살아나는 원리가 들어 있다.

세례(침례)란? 새 주인을 모신다는 뜻이다.

옛 사람 물 속에 들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새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세례이다.

물 속으로 들어가면 숨을 멈추어야 한다. 즉, 죽음을 의미한다.

나의 욕심, 나의 교만, 나의 분노, 나의 죄성, 나의 열등감, 나의 절망까지도 다 죽이는 것이다.

장사지내고 옛 자아는 다 죽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침례식처럼) 물 속에서 나오면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옛 자아가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은 1번으로 끝이 아니다.

계속적으로 죽어야 하고 계속적으로 싸워야 한다.

내면 세계의 전투가 가장 힘든 전투이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 16:32)고 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직면하면 모든 것내려 놓는다.

지위도, 지식도, 재물도, 학벌도, 명예도... 모든 것을 죽음 앞에서는 내려놓는다.

그렇게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던 것을 내려놓고 떠내 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야 예수님과 더불어 살 수 있고 성령의 삶을 살 수 있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생명이 있다.

1) 죽어야 할 생명 : 색욕과 육신적이고 정욕적이고 이생을 자랑하는 생명

2) 살아야 할 생명 : 거룩하고 영적인 생명이다.

죄악, 욕심, 불순종, 미움, 분노, 두려움, 욕망, 실패, 수치, 거짓, 색욕 ...등등

(갈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4)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고전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왜 날마다 죽어야 합니까?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해서이다.

죽지 않으면 새 생명을 누리 수 없다.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없다.

주님은 진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삶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목숨을 버리면 얻을 것이요. 얻으려 하면 잃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 지면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욕심 부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자기를 부인하면 인정받게 되고,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면 높아진다.

(요12:24)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예수 믿은지 오래 되어도, 삶이 공허하고 승리의 기쁨도 없고 인생이 무미건조한가?

옛 자아가 아직도 죽지 않고, 아직도 욕심이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속에 신령한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살면 가정이 죽고, 내가 죽으면 가정이 산다.

내가 살면 교회가 죽고,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내가 죽는다는 말은 옛 사람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 붙잡혀 살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예화) A.D. 313년 콘스탄틴대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었을 때에 핍박이 사라졌다.

문제는 그 때부터 기독교는 타락과 부패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부터 십자가의 신학이 사라지고, 로마의 권력과 타협했다.

순교자의 정신은 사라지고, 출세자만 늘어났다.

권세자리 다툼의 종교전락(轉落)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자들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것이다.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내 안에서 날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 될 것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다.

(결 론)

(16-17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24-25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욕심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할찌니라.

내 마음을 노예처럼 만드는 욕심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쥐고 있는 세속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야 한다.

자유를 빼앗아 가는 죄악죄책감 욕심교만좌절감패배감.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십자가부활이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부활이 없는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음이 없는 부활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

죽음과 함께 부활의 생명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옛 사람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좇아 순종하며 살아 갈 때,

여기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승리기쁨이 충만히 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승리기쁨을 날마다 누리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주가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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