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2일 수요일

영원한 신앙고백


영원한 신앙고백(갈 2:20-21)

신앙고백에는 누구를 믿느냐하는 믿음의 대상
무엇을 믿느냐하는 믿음의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믿는 신앙은 고백되어져야 하고그 고백이 옳다고 인정될 때
나의 신앙은 입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마 16:13-17)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엘리야예레미야선지자 주의 하나 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신앙 고백했을 때에주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해 주셨다.
그러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 고백은 입으로 하는 고백이 있는가하면,
고백이 형태적으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신앙고백이 있다.
그리고 그 형태는 시대마다 환경마다 달라질 수 있다.

1) 어떤 경우에는 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이 곧 신앙고백일 수 있다.
(약 100년전 우리 한국 교회의 <초대 교회시절에는 주일날이면 <교회>에 절대로
가야 한다는 신앙고백을 갖고 우리들의 부모님과 할아버지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래서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에 나갔고월요일에 학교 가면 혼날 줄 알면서도 교회에 출석하였다.  농사일을 끝내야 교회 가는 것을 허락” 받는다고 해서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밤새토록 
일하고 주일을 지켰다.
일제 시대와 공산정권 아래에서는 그 모든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신앙고백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주일 안 빠지고 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일제시대와 공산정권 시대에서는
놀라운 신앙고백이었다.
그러므로 예배당 문안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고백인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교회 출석하는 정도로 그 신앙을 인정받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은 그 정도의 신앙적인 모습도 보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이것은 지금도 중국 땅이나중동 지방의 회교권 가면 사실이다.
그 분이 교회를 출석하면 공산주의 사회가 주는 모든 특권과 혜택을 반납해야 한다.
어떤 핍박을 받게 될 찌 몰라 사람들은 불안해서 교회 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런 분들이 교회에 당당하게 나타나서 교회에 입장하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놀라운 신앙 고백이.

그런가 하면
2) 성경책을 확실하게 들고 다니는 것이 신앙고백인 경우도 있었다.
제가 어릴 때에는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서 신문지나 마분지에 싸서 들고
다닌 분들도 있었고포켓용 성경책을 뒷 주머니에 넣고 교회 오는 분들도 있었다.
지금은 자동차 뒷 자리에 널려져 있다.
그 때는 집에서 출발하여 교회에 들어 올 때까지 성경책만 잘 들고 다녀도,
그것이 곧 신앙고백일 수가 있었다.

3) 또 어떤 경우에는 직장에서 직장 성경공부에 동참하는 것이
신앙고백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 직장에서 누구든지 예수 믿는다고 하는 고백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것이 이미 신앙고백으로서의 효용가치가 떨어진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니까 신앙고배의 형태가 시대에 따라 좀 더 다르게 요청되고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불변의 3가지 신앙고백만큼은 언제나 변하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영원한 신앙고백 3개가 있다는 말이다.

1)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고 하는 신앙고백이다.
내가 그것을 믿습니다고 하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2000년 동안 한번도 변함없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흐르는 신앙고백이다.  사람들은 이 신앙고백을 기뻐합니다즐거워합니다감사해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보다 또 다른 단계의 신앙고백이 있다는 것을 외면한 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본다아니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2)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나도 함께 달렸다고 하는 신앙고백이다.
나도 함께 죽었다고 하는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denial)하는 고백이다.
어떤 분은 이것을 자기 파쇄라고 말한다자기 깨뜨려짐이라고 말한다.
그처럼 강했던 자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산산조각 되는 자기 파쇄의 사건
있었고자기 부인의 사건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원리이다.

3)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는 신앙고백이다.
나는 이미 죽었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는 고백이다.
(빌 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가 풍랑 속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
모라비안 교도들이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이렇게 물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내 안에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 문제 될 것 없다. (No Problem)
다같이 No Problem(문제 없다) :
홍해 바다가 가로 막고 있어도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해도골리앗 장군이 아무리 커도,
몸에 병이 생겨도남편이 속을 썩여도자식이 속을 썩여도돈이 떨어져도... No Problem
But 한 가지 (믿음이 떨어지면) Problem, Big Problem...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삶은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해 준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법칙과 원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바람도구름도식물과 동물도무생물까지도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에 따라 움직이고
생성소멸한다힘이 쎈 코끼리도 자연에 순응하며 산다.
포악한 호랑이도 자연의 범위 안에서 머물러 산다.
자연으로 식물이 자라고자연에 모든 동물들이 순응한다.

그런데생명의 시작과 더불어 놀라운 신비가 있다면
사람만이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만이 자연을 넘어선다자연을 거스린다자연을 넘어선다.
이것을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이 자유의지를 갖게 된 그 원인은 하나님의 창조 때까지 거슬려 올라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대로 창조했지만,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여러분 !
자유의지는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하나님만이 마음대로 하신다하나님만이 마음대로 결정한다. 그런데그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실 적에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인 
자유의지 마저도 창조해서 인간에게 주셨다.

(C. S. 루이스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적에 자유의지를 만드는 작업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다고 했다.

이 자유의지는 심지어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마저도 거부할 놀라운 권세를 가졌다.
그것을 간파한 사탄이 아담과 하오를 꼬이자그들은 맥없이 무너졌다.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꾀임 속에 자유의지가 이용되었다.
그 이후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다자기 욕심과 정욕에 따라 자유의지가 쓰여지고 있다.

그런데여러분!
그처럼 높아진 자유의지이렇게 타락한 자유의지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자기 부인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진다는 말씀이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도바울도 이처럼 높아진 건방진 생각을 쳐서 복종시키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고, 자신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입으로 시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만드는 축복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둘째로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하는 신앙고백은 :
2)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많다.
그 중에 사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워할 것 다 미워하고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비판할 것 다 비판하고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이 안된다.
그러니까 사랑은 말뿐이다.

(우리가 자식을 향해서 비판하기를 포기하기 때문에 자식들의 그 잘못을 보면서도
욕하기를 중단한다또한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자기 부정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 안에서도 이웃 형제들을 볼 적에 나와 다른 일을 하고,
나와는 다른 모습을 한 믿음의 형제를 볼 때에도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자기 부인의 길은 형제를 사랑하게 만든다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만듭니다.
자기 부인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외소해지고 사랑이 안 되는 것이다.

(죽기 전에 3가지를 후회 한다고 한다.
좀 더 참을 걸(좀 더 기다릴 걸), 좀 더 베풀 걸 (너무 인색하게 살았어)
좀 더 기쁘게 살 걸 (화목할 걸공연히 혈기 부렸지...) Peace Maker


셋째로 자기 부인의 길은 :
3) 풍성한 열매를 맺게되는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노라고 하는 자기 부인의 길은
내 인생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다.

(사람들은 일하고 나면 언제나 자기 것을 끝까지 붙잡는다.
내가 붙잡으면 시시해 진다내 공로를 내세울 때부터 그것은 초라해 지고작아진다.
그러나 오히려 내려놓고그 공로를 이웃에게 돌리고그 영광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은 그것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신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일을 하면서 효과적으로 못하는 것은 그것을 꼭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항상 내가 주장하고내 의견이 관철되어야 하고내가 이익을 봐야 하고내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내가 나타나야 하고내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는 나 중심으로 생각
하니까 일이 안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슨 일이든지 일이 바로 되는 것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것을 내어주는 자기 부인을 하는 사람만이 열매를 풍성히 얻고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내 것이 되면 그것은 나의 일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주님의 일만 잘 되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자기를 부인하는 그 길은 :
1) 우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는 축복을 누리게 해 준다.
2) 진정으로 이웃 형제를 사랑하게 만든다
3)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결실의 삶을 살게 만든다.
그것이 자기 부인함의 축복들이다.

그러면자기 부인함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을 배웁니까?

그것은 우리 예수님의 부인함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비결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부인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자식을 내어 준 그 큰 사랑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림자로 보여 주셨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자기 독자 이삭을 죽이려는 그 마지막 순간에,
Stop시키셨던 하나님은 자기의 독자 예수님을 죽일 때에는 Stop 시키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원수들이 자기 아들에게 조롱하는 모습도 다 보셨다.
채찍으로 때리고두 손과 두 발에 못을 박았다.
그래도 하나님은 전능하신 두 팔을 스스로 묶어버리시고끝까지 죽게 하셨다.
그 놀라운 자기 부인(denial)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살게 된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왜 아브라함이라고 했을까요?
왜 모세라고 하지 않고왜 다윗이 아닐까요?
아브라함만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골고다 언덕에서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았기 때문이다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았다.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사랑인지 아브라함만이 그 때그 모리아 산에서 경험했다.

그런데 여러분 !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면서도한편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무슨 말씀인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을 받으시되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뺨을 맞으시나 같이 포악하지 아니하셨고자기를 향한 무수한 수욕을 
다 당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셨다
주님의 자발적인 자기 부인의 모습이셨다.

여러분!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며,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믿을 때,
그 믿음 안에서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를 사랑하사 를 위하여> 라고 하는 개인화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말과 내가 죽는다는 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이야기가 달라진다.
(남의 자식 100명 죽어도 내 자식 한명 죽는 것과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고 하는 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마찬가지로 이 말씀이 개인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 때그 주님이 나로 하여금 자기 부인의 길을 걷게 하신다.

(죠지 뮬러에게 :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까물었더니,
능력이라니요나는 요내 생애에 죽는 날이 이었습니다.
그것이 능력 있는 삶의 원천이 되었다고 했다.

(결 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는 신앙고백은 갖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이 고백은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서 펄펄 뜁니다혈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 놀라운 신앙고백과 함께 주님의 사랑 앞에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자기 부인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들은 내가 나에 대하여 죽고우리 주님은 내 속에서 사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성령님께서 이 은혜로 우리 심령 속에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 도)
다같이 찬양합시다.
6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아버지 !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경험을 날마다 갖게 하시고주님이 내 속에 사시는 놀라운 삶을 살게
하옵소서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신앙고백과 함께 오늘 이 시간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자기 부인의 영광된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축복을 
다시 회복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마저도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우리들의 생애에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은혜를 입게 하시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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