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8일 화요일

실용주의적 기독교, 번영신학을 경계하라


실용주의적 기독교, 번영신학을 경계하라.(막 10:35-45)


오래 전, 사당동 총신대를 다닐 때, 기독교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철학의 기류 중에 [실용주의 철학](Pragmatism)이라는 것이 있다.

(1870년 무렵 미국에서 시작된 철학적 전통이다.)

찰스 샌더스 퍼스가 그 시작되고, 20세기에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에 의해 발전된 철학이다.

실용주의의 가치관은   진실, 정직, 거룩...  그런 가치관이 아니라,

얼마나 실제적으로나에게 유용하고, 유익한가를가치 기준보는 철학이고 세계관이다.


현대인들은 실용주의적 삶을 추구하는 것 같다.

모든 생각과 결정은 유용성과 내게 유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본다.

(예) 결혼을 결정하는 것도경제적인 이득에 도움이 되는지?

교회를 선택하는 것도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

내가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나의 책임과 역할보다는 이 교회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만일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면 떠나 버린다.

사람들이 교회 출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믿으면 행복이 약속된다.

자신들이 예수 믿기 전에는 실패와 불행이었지만, 예수 믿고 난 후에

얼마나 성공하게 되었고, 행복한 인생이 되었노라고 간증한다.

이혼 직전의 가정이 회복되었고, 병든 몸이 치유되었고, 사업이 번창되었고,

자녀들도 잘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삶의 질이 변하고,

몸도 건강해 지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생활도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복음을 받아들인 개인과 사회가 발전하고, 진보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만사형통하리라는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성경이 약속한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자가 성공하고 번영해야 하나님도 영광 받고, 전도도 더 잘 된다고 하는

영광의 신학(Theological Gloria)도 성경이 말씀하는 본질이 아니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이런 형통신학, 번영신학, 

영광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어렵게 살던 대한민국에서는 큰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하고매사에 승자가 되어예수 안 믿는 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제 자본주의 복음이지 성경적인 올바른 복음사상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멋지고, 건강하고, 형통하고,

번영하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매력적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연예인, 유명한 운동선수, 사업가, 대중문화의 대변자들을 불러다가

간증 전도집회에 단골손님으로초청되어 축복의 깃발을 흔들게 했다.

그러나 성공신학, 번영신학에 물들여 있는 교회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병든자, 실패자,

가난한 자를 간증자로 세울 수 있을까요?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예수 믿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을 유용하게해 주기 때문에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많은 경우더 많은 고난과 세상 부귀, 영화를거절해야하는 경우도 많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현세적인 모든 문제를해결해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속주로오신 분이시다.


(45절) 인자의 온 것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다.

죽음, 질병, 가난, 재난, 전쟁, 교만, 미움, 이기심...

이런 모든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임을 주님은 아셨다.

기독교는 우리 개인적인 문제 해결이나, 행복을 위한 종교적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다는 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문제는 오늘 본문에서제자들의 신앙관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서 현세적인 번영과 영광을 꿈꾸고 원했다.

야고보와 요한은 드러내 놓고,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편과 좌편 자리를 요구했고,

다른 제자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제자들이 말하는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예고했을 때 :

시몬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

간하여 :  이 말은 간절히 라는 뜻도 있지만, 야단치듯이 말한다는 뜻이다.

아니,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왔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말이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니,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갔다.


그들의 주님을 따라왔던 신앙은 목적이 아니라문제 해결의 수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실용주의적 신앙관으로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은지? 물어보아야 한다.

주님이 오셔서 지금  “내가 너에게 무엇 해 주기를 원하느냐?”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건강, 부귀, 장수, 행복, 명예, 인기, 권좌... 등등 그런 것 뿐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막 9:23)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합니까?

이 말씀이 믿으면 현실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뜻입니까?

그런 말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오늘, 여기서다 해결해 준다는 것이 아니다.

처음 예수 믿기 시작할 때는 나의 어려운 문제 해결 받으려고 오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화) 예수님이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요술쟁이가 아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내 소원 들어주는 마법사가 아니다.

그렇게 예수를 생각하고 믿는다면 예수님을 오해하고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의 역사관, 종말론은 주님이 다시 재림하여 오실 때 :

궁극적으로는 해피엔딩으로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는 십자가의 길, 골고다의 길, 가시밭 길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끝까지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눅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의 복음의 소식은  기쁜 소식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의 복음이실용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갈보리 산에서 우리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셔서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고새 생명을 주시고산 소망을 갖고 살도록

하신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성도는 이 땅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벧전 1:24)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풀과 같은 인생이다. 아침 안개와 같은 짧은 인생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쇠약해 간다.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이 세상의 부귀, 영화, 권력, 성공, 아름다움, 건강... 

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풀의 꽃과 같다.


이번 코로나 19 팬데믹, 세계적인 유행병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너무 크다.

백신이 개발되지 못하면 정말 이전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죽음의 문제와 함께 죽음 이후 심판받게 될 문제가 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있으리니...

인간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다.

그 이후에 심판이 있고, 두 개의 영원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영원한 고통이냐? 영생복락이냐? 는 문제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의인은 없나니하나도 없다. (롬 3:10)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심판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우리 안에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밖에서 의(義) 덧입어야한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복음의  의(義)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대속적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부활을 통해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고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그 분의 의(義)가 우리에게 덧 입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는 그에게로 전가되고, 그 분의 의(義)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이전가의 법칙이고, 십자가 대속의 원리이다.


이 세상 안에는 과 어두움이라는 두 세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의의 세력이고, 또 하나는 불의의 세력이다

하나는 하나님께 속했고, 또 하나는 사탄 마귀에게속했다.

사람들도 하나님께 속해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마귀를 따르는 어두움의 무리들이 있다.


신앙생활이란?[어두움의 세력]과의 싸움이다.  (갈 5:17)

이 싸움은 주님이 재림하여 오심으로 우리 신자들의 궁극적인 승리로끝날 것이다.

그 날까지는 우리의 삶이 환난과 고통이 있다 할 찌라도 :

예수는 나의 구원자이시며,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성령님은 나의 보혜사 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우리가 주님을 따름으로 이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시련하려고오는 불시험을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결 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 신앙을 추구하는 것은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실용성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 신앙을 선택하는 것은 :

주님이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크고 넓으신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피조물도 이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승리의 찬가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내가 확신하노니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아무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지만, 사실은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앙의 참된 의미와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을 올바르게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감사하며 찬송부르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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