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5일 일요일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 (고린도전서 15:10)
오늘의 주제는 매우 거창하기도 하고,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이해를 잘 해야 하는 내용이다.
그래도 잘 들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은혜를 받게 된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오늘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리지만, 핵심은 은혜에 있다.
먼저 생각할 것은:
1) 인간의 타락과 대실패 : The Great Failure.(Sin) 창 3:16-17
인간은 본래 하나님과 사귀면서 평안과 행복한 인생을 살도록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수고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피곤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었고 이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복과 저주, 상과 벌을 주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신상필벌 (信賞必罰) : 믿고 순종하면 복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이라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났다.
2) 율법의 체계
A) System에 있어서 : 실패와 인간 체계가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나?
공적체계(功績體系)로 달라졌다. 공로와 실적으로 평가함.
Merit [mérit]: 공덕(功德). 공적, 공로, 훈공;
(학교 성적 등급과 벌점에 대하여) 상점(賞點);
쉽게 말하면, 일할 때 일한 만큼의 대가(代價)를 받는 것이다.
(예) 학교 학생은 : A B C .... 성적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연히 조건적 관계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열심히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모든 관계가 : 수직적 체계로 이루어진다.
(예) A B C .... 이 말은 : 차등과 등급의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
B) Relational 있어서 : 인간관계와 물질적 관계가 달라졌다.
모든 관계 즉, 학교, 직장, 결혼, 스포츠, 사회생활 ....
어떤 사회, 국가, 단체의 모든 관계가 조건적이고, 수직적이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의 법칙이다. 공적(功績)체계의 법칙 ➡ 상과 벌
C) Principle : Law(법)적인 원리, 율법적인 원리 아래서 산다.
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그 법의 속박 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사람들은 이런 공적체계의 법칙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공적체계의 법칙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은혜>에 대해서 말하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예) 마치 물고기에게 공중의 새에 관한 이야기를 하듯이 이해가 어려운 것이다.
D) 그러므로, 그 결과(Result)는
율법과 법이 있으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선>은 지켜지지만, 반드시 <속박>이 따라온다.
가) Bondage : 속박, 노예, 부자유, 굴종적인 삶이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나) Anxiety (요 14:1, 빌 4:6) :
근심과 불안, 긴장... 등이다. 안식이 없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CF) 구약은 율법에 매여 살았던 이스라엘의 대(大)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The great Failure of Israel is Old Testament.)
(예) 학교 실라버스 ... 레포트, 시험, 학기말 고사,... Drop할까, 말까....
율법에 속박되니, 반드시 근심과 불안이 따라온다.
율법은속박을, 속박은 근심, 불안을 가져온다.
*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괴롭고 불행한 신앙생활을 한다.
(예) 11조를 하니까 - 하나님이 축복합니까? 안 하면 축복 안 합니까? 저주받습니까?
11조가 조건부이고, 하나님과 Deal(거래, 협정, 타협)하는 것이라면 :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겠습니까?
안 그래도 힘들고 어려운데... APT 렌트비도 내지 못하는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예수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11조는 조건부가 아닙니다.
믿음의 감사 표시이다. 나에게 주신 복들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내는 것입니다.
예물은 복에 대한 조건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율법적인 삶이지, 은혜의 삶은 아니다.
(예) 어떤 장로님이 : 장로이기 때문에 ➡
매일 새벽기도에 나와야 한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율법에 매여서 기도하고, 새벽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은혜를 깨달으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고 기쁘게 열심히 새벽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예) 저는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목사이다.
그렇지만, 주일성수가 율법이 되면 행복이 없다.
속박과 노예적인 신앙생활이 된다.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면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외식주의적인 삶이 나타난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삶이었다.
(예화) 한국의 유교문화의 처세술은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중요하다.
그렇게 사니 얼마나 피곤한 사회입니까?
내가 목사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목사이기 때문에, 장로이기 때문에, 권사이기 때문에...
보이는 신앙생활은 종교적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고, 한편 서럽기만 하다.
당신은 장로이니까.... 그러면 당신은 목사이니까...
물론 그렇게 목사답게, 장로답게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율법의 세계는 율법으로 돌아온다. 용서가 없다.
(예) 예수를 믿으니까 :
하지 말라는 것이 많다. (술, 담배, 화토, 놀음...) 다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담배 안 피울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돈, 건강, 이웃... 손해와 낭비..)
3) 은혜의 체계 :
그러니, 여기 ( 종교적 율법주의 생활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율법적인 삶에서 자유하고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롬8:1, 갈5:1)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지만, 타락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렇게 율법 아래서 부자유하고 속박과 근심과 불안 가운데 사는 인간들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해 주시고,
은혜의 체계 안에 들어와 살라고 무한한 축복을 주셨다.
율법의 체계는 무엇을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적인데 비해서, 은혜의 체계는 무조건적이다.
(예) 칼빈의 기독교 강요 : 5대 교리 가운데, 무조건적 선택이 있다.
은혜는 조건이 없다.
조건과 행함, 공적(功績,공로와 실적)으로 말미암는 것은 보상이고, 대가이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조건이 없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귀하신 성도 여러분 !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성수해야 하고, 11조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런 것은 구원 받은 자들이 당연히 지켜나가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복의 조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복 받기 위한 조건으로 하면 율법이 된다.
그래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을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지, 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무조건적이니,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수평적이다.
그래서 높고 낮음이 없다.
나도 못할 때가 있으니, 수평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죄가 없다. 나도 똑같으니 말이다.
그래서 용서해 주고, 기도해 주고, 사랑해 주게 된다.
율법의 체계는 수직적인데 비해서, 은혜의 체계는 수평적이다.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꼭 깨닫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은혜의 개념을 배워야 한다.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율법 체계의 공식은 : 율법속박근심, 불안.
은혜 체계의 공식은 : 진리자유기쁨, 행복.
(예화)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어떻게? 예수님 안에서, 진리 안에서 자유하니까 자신이 기뻤다.
그런데, 사탄은 은혜 체계에서 사는 사람들을 공적체계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이다.
율법의 속박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어 자유와 기쁨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계속적으로 선포하며 강조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은혜라는 것이다.
(예화) 마태복음 20:1-6 (포도원 비유)
포도원 주인은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라고 했다.
일한 대가로 한 데나리온씩을 약속하였다. (오전 9시, 정오12시, 오후 3시, 오후 5시)
이런 상황이 이 세상 직장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공적체계의 사회에서는 정당치 않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준 내용인데 :
공적체계의 눈으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어가는 곳이다.
그런데 내가 받은 은혜가 도리어 정죄의 눈으로 바뀌는데 문제가 있다.
(예) 장로님이 새벽기도 매일 했다. 그런데 어떤 장로님이 새로 이사 왔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새벽기도 안 한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새로운 장로는 신앙이 약하구나. 그렇게 판단하고, 내 밑에 놓는다. 정죄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그 장로님을 보면 마음이 괴롭다.
내 은혜로운 새벽기도 행위가 정죄의 칼로 바뀌게 되는 불행이 일어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런 알력과 충돌이 늘 있어 왔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이와 같은 율법과 은혜에 대한 변론이 기록되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율법의 삶이 아니라, 은혜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축복 받는 것도 아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 은혜의 파라독스(역설) (The Paradox of Grace)
그렇다고 여기서 조심하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
은혜를 받고,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방종하며 무분별하게
(소위: 율법무용론자처럼)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혜만 주장하다보면 방종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롬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오히려 더욱 경건하고 주의 법과 말씀을
지키며 살아간다.
본 헤퍼(Bonhoeffer)가 말한 대로 값싼 은혜(Cheap Grace)란?
죄인의 삶의 변화가 없이 교리에만 동의를 하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 인간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Cheap grace is the intellectual assent to a doctrine without a real
transformation in the sinner's life. Cheap grace arose out of man's desire
to be saved, but to do so without being a disciple."
그리고 진정한 은혜는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능력까지 포함된 은혜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I am what I am because of Him.
not I, but the grace of God that was with me.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 때문에 은혜의 세계 속에 넘어왔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감사하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없다.
예수님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이 변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예배드리는 것도 예수님 때문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
제가 이 자리에서 설교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 내게 있는 모든 것... 가정, 건강, 물질, 자녀, 지식, 신앙, 구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결 론)
오늘도 우리가 예배드리고 이 세상으로 나가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율법적인 체계가 기다리고 있다.
육신은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고, 잘 하면 수입이 더 좋을 수 있는 :
이 세상은 Merit 공덕(功德), 공적의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은혜의 체계에서 공적체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신앙 생활은 이 두 세계의 충돌과 고민과 Struggle(싸움과 투쟁)이다.
외적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사도 바울만큼, 핍박과 속박 속에서 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자유하고 기쁨을 누리며 산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은혜 세계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참 자유진정한 기쁨과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있습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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