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1일 화요일

주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


주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 (마 6:16-18)

오늘 본문 말씀은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믿음의 자세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금식기도를 하거나 구제할 때에 "나는 한다"고 떠들지 말라.
기도하거나 선행할 때에 사람들 앞에서 광고하고 소문내지 말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 금식, 기도, 헌금, 선행을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정신은 그렇지 않다.

(예화) 현대는 P.R 시대이다. 메스콤 시대라고 한다.
광고의 효과에 따라서 매상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런데 화장품 원가의 40%가 광고비라고 한다.
화장품을 선전하느라고 막대한 예산이 든다.
그런데 화장품 광고의 40%가 사실과 다르답니다.
그러니까 광고의 많은 부분이 거짓말이거나 과장된 선전이라는 말이다.

신앙생활도 광고하고 선전하며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도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주관이 없어진다. 남의 평판에 이끌려 산다.
자기 자신의 주도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고, 타인 주도적인 인간이 되고 있다.
내 생각, 내 주관이 아니다. 타인에 끌려서 간다.
그러다 보면 기뻐하는 것도 내 기쁨이 아니다. 슬퍼하는 것도 내 것이 아니다.
맘에 없으면서도 끌려 다닌다. 옷을 입어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집을 하나 사도 내가 이 집을 사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러므로, 분수에 넘치는 집을 사고 고생하는 이들도 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이다.
다른 사람의 눈이나, 평판에 이끌려 살면 위선적인 신앙이 되고 만다.
기도란? 하나님과 나와의 진실한 대화의 시간이다.
누구도 끼어 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광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은밀한 중에 갚으신다고 했다.
그렇습니다."은밀한 가운데"이루어지는신비로운 만남이다.
“성 안토니아”가 3년 동안 산 기도했다.
그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아주 짧은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누가 뭐라든지 상관이 없다.
매일 같은 기도, 짧은 기도였지만, 그 안에 기쁨이 있었고, 진실이 있었고, 감사가 있었다.
행복도 일종에 나의 비밀이다.
누가 뭐래도 내 안에 기쁨이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나를 부러워해도 내 안에 기쁨이 없으면 나는 불행한 것이다.
(잠 14:10)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나만의 행복!
이것은 부모도,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그 누구도 모른다.
오직 나와 하나님만 아신다.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고통도, 행복도다 나의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은이나 청소년들은 이유 없는 반항한다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다 이유가 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비밀이 있다.
저 사람은 참 훌륭하고 저 사람은 어쩌다가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르는 소리다.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
남들이 모르는 숨은 아픔과 인내와 수고와 그 무엇인가가 분명히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만의 고통을 부르짖는 것이 기도이다.
나만의 행복을 고백하면 그것이 감사기도가 된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 담겨있는 기쁨을 아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남들이 아무리 칭찬한다 한들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남들이 아무리 비난한다 한들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작 내가 기쁘고, 나만이 아는 행복의 비밀이 있어야 한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처럼 "나만이 아는 신령한 기쁨"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이다. 그래서 이 기쁨이 있는 자가 신자이다.
다니엘처럼 주님과 나만의 열린 창문이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 (렘 15:16)이라고 했다.
그냥 교회만 출석하는 교인과 참 신앙인의 차이점이 어디 있나요?
나만이 아는 체험이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이 있는 사람은 참 신앙인이다.
사도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고,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고후 12:1-3)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체험인가? 바울만이 경험한 기쁨이다.

주님과 나만이 아는 신비체험이고 기쁨이다.
예수님께서도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시곤 하셨다.
십자가지시기 전날 밤에 겟셋마네 동산에 가셔서홀로 기도하셨다.
나만이 아는 고통을 가지시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 은밀한 관계가 신앙이다.
우리가 남들에게 속을 때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가 나 스스로를 속일 때가 더욱 슬픈 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과 나 자신을 속일 순 없다.
기쁨도 없으면서 기쁜 척 스스로를 속이는 신자가 많다.
신앙은 진실이다. 반대말은 외식이다.
위선과 가식으로 광고하고 떠드는 것은 불신앙이다.
마치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보이려고 외식적으로 웃고, 거짓으로 우는 광대와 같다.

기도는 광고할 사항이 아니다.
금식 기도는 선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가 볼까봐 조심하라고 하셨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세수하고 티내지 말고 나타내지 말라는 것이다.
남들이 몰라주면 어떠습니까?
하나님이 아시고, 나만의 기쁨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요한 칼빈은 임종시에 27번 외웠다고 한다.
오늘의 고난도 지나가는 것이요. 잠깐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섰다.
군중들은 예수님에게 소리 지르고, 비방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인자가 구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의 생각은 저 멀리 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시면서 이것으로 모든 비난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밀스런 기쁨을 아셨다.
나만이 아는 비밀의 행복, 신비스런 기쁨을 갖고 계셨다.

나만이 볼 수 있는 창문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사도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자신이 얼마나 행복했으면이렇게 말했을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행 26:29)
모든 사람들이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분명히 사도바울에게는 주님과 나만이 아는 행복이 있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러한 비밀과 이 행복 속에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는 웃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면서 죽어 갈 수 있고,

성도는 이런 영광스런 비밀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웃음을 웃으며 사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하고, 사거리 어귀에서 기도하고, 구제했다고 신문기자 부르는 것이 아니다.  참 신앙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 생각한다.
참 신자는하나님과 나와 관계속에서 얻어지는 기쁨을 갖고 사는 자이다.
참 행복은내 마음 속에주님과 나만이 아는 기쁨이참 행복이다.
이러한 행복을 가지고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며 살다가,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가 예비하신천국에 들어가서 영생복락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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