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3일 금요일

사기충천(使祈忠天)의 신앙


사기충천(使祈忠天)의 신앙 (행 20:22-24)
[참고 : (士氣衝天)이 아니다.] 사기가 충만하여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는 말이지만,
오늘 설교 제목의 말씀은 한문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해 두고 듣거나,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의 생애를 연구해 보면 놀라운 신앙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와
천국 복음을 위하여 목숨 받쳐 일하며 헌신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가졌던 신앙의 특징을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사명(使命)에 불타 있는 신앙.
(행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는 다 사명적 존재이다.
풀 한포기도, 공중에 나는 새 한마리도 다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어서 창조하셨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목적 없이 지음을 받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언제나 일군을 찾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쭈구리고 앉아서 :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 이렇게 의미없이 살고 있나?”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라고 보냄받은 존재이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 의미없이 태어나고, 목적없이 온 사람은 하나도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필요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의 사명을 깨달을 때, 목숨까지도 받쳐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칼 힐티<사람이 사명을 받은 날이 태어난 날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왜 사는지를 알고 사명감을 가지고 살면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왜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는지?
왜 여기 미국, 그것도 L.A.에서 살게 하셨는지?
왜 이 교회로 보내주셨는지?
내게 왜 이런 은사와 달란트를 주셨는지?
내게 왜 그런 공부를 하게 하셨는지?
왜 나의 비즈니스는 지금하고 있는 것을 하게 하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사명인가?
1) 남보다 더 가진 것이 사명이다. 돈, 건강, 지식, 재능, 권력, 복음 등등
2) 아픔이 사명이다.
가난, 병약, 대학입시 재수한 것. 죽을 병에 걸린 경험. 사업실패의 경험. 등등
이런 모든 나의 실패와 아픔은 나의 사명이다.
3) 부담감이 사명이다.
장애인만 보면 눈물이 난다. 가난한 사람만 보면 못 견딘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예수 믿게 하신 이유가 있고,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 있다.
(예) 사도 바울은 이방 민족만 보면 안타까웠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았던 사람이다.
오직 한 일 그것만을 위하여 살았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성령께서 증거하시기를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미리 알려 주셨지만,
사도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전파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했다.
그는 오직 사명을 위해 살았던 사명의 사람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명을 위하여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기 생명, 목숨이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주님도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목숨보다도 더 귀한 것이 사명이라는 말이 된다.
사도 바울은 사명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까워 하지 않았던 것이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이것이 모세의 사명감이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들 각자의 사명을 깨닫고 교회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사명의식에 투철한 사명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 기도(祈禱)에 힘쓰는 신앙.
사도 바울의 사역과 삶의 특징은 기도에 힘쓰는 신앙이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신다.
기도는 위대한 능력이다. 기도는 모든 문제의 열쇠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데, 기도하는 법은 없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기도하는 사람은 승리하게 해 주신다.
사도바울은 주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고비 고비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늘 나아가 기도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를 통해서 새 힘을 공급받았다.
그는 기도하다가 3층천 까지 갔다 온 경험을 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통해서 능력 있는 사역을 했다.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5:17)고 했다.
그는 눈물로 기도했고 부르짖어 기도했고 감옥에서도 기도했고,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늘 기도에 힘썼던 종이었다.
3) 충성(忠誠)을 다하는 신앙.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다.
그래서 (고전 4:2)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 했다.
여기의 충성(피스티스)이란 말은 진실함, 성실함, Faithful 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충성은 순수한 동기로서의 충성이다.
어떤 공명심이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은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주님을 위한 충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든 지, 안 보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는 일하는 것이 충성이다.
[코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충성이다.
(예화) 고려 말기에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생각 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마음이 충성된 신하의 마음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자신의 주군에게 이렇게 충성을 고백함으로 죽었다면,
영생을 소유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충성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마귀의 종이 되어서 마귀에게 충성하던 자이었다.
그러나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얼마나 충성을
다 했는지 모른다. 바울의 생애는 주님께 충성 다하는 신앙이었다.
동물 중에 가장 충성스러운 동물은 역시 <개>Dog 이다.
그래서 충성스런 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예화) 몬타나 주 농장 집 이야기 :
3살된 어린 여자 아기가 열린 문으로 나갔다.
늑대 2마리가 나타났다. 이 아이가 위험에 처했다.
그 때 집에서 키우던 개가 늑대 두 마리와 싸우고 주인 소녀를 보호했다.
결국 2틀 후에 죽었다. 목숨 받쳐 충성한 개 였다.
(예화) 사냥꾼이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주전자의 물을 컵에 따랐다.
그러나 주전자 우유 속에 (독사)가 들어 있는 것을 몰랐다.
주인이 컵에 따라 마시려 하면 개가 덤벼들어 컵 든 손을 쳐서 못 마시게 했다.
계속 그러니까, 주인이 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해도 또 덤벼들다가 정말 칼에 찔렸다.
그 때, 주전자도 쏟아지고 그 안에서 나온 뱀을 발견했다.
그 충견은 목숨을 내 놓고, 주인을 구해 낸 것이다.
이것이 충성이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도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셨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전 4:2)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시록 2:10)
4) 천국(天國)의 소망을 두는 신앙.
사도 바울의 소망은 천국에 있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몸을 떠나 천국에 계신 주님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빌 1:23)
중국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ㄱ) 공인된 교회 : 이런 교회는 정부가 정한 금지 사항이 있다.
a) 예수 재림 설교하지 말 것.
b)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설교하지 말 것.
c) 종말론적이고, 내세적인, 요한계시록 설교하지 말 것.
ㄴ) 지하 교회 : 진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교회이다.
지하 교회에서는 위의 3가지를 주제로 설교한다.
참된 신앙심을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은 :
모두 내세 중심적이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했던 사람들이었다.
오직 천국만을 바라보며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았던 성도들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일 때문에, 손해 보고, 핍박받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다.
왜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순교하며 죽었나요?
천국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궁극적으로 소원하고 바라는 것은 하늘나라, 천국이었다.
우리 신앙의 마지막은 천국의 영광과 면류관에 있다.
♬ 달려갈 길 다가고 싸움 모두 마친 후, 주와 함께 기쁨을 용사들아 누리세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받아쓰리라.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면류관 받으리∼ 저 요단강 건너,
우리 싸움 마치는 날 의의 면류관 예루살렘 성에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상급과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지내고, 이 땅에서 명예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도바울은 마지막 날에 내게 주실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딤후 4:8)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 받쳐 충성하였던 것이다.
(예화) 주기철 목사님과 순교자들.
(예화) 순교자 폴리갑 :
우리 주님은 86년 동안 나를 한번도 배반한 적이 없는 데, 어떻게 제가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화형 당해 순교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주의 일을 힘쓰고
썪을 장막 떠날 때에 주의 얼굴 뵈오리.
빛난 하늘 그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 없는 영광 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결 론)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본이 되었던 사도였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본(本)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명(使命), 기도(祈禱), 충성(忠誠), 천국(天國)
사도바울의 신앙의 첫 글자만 따면 (외우기 좋게) 사기충천(使祈忠天)이다.
그런데, <참고: (士氣衝天)이 아니다> 한문이 다르다.
우리는 매우 짧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또한,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들의 남은 생을 사도바울과 같이 사기충천(使祈忠天)의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그 어느 좋은 날 아침에, 천국 들어가서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듣고,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우리 모두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사기 하면, 다같이 충천 하세요.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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