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8일 월요일

기독교 교리와 생활, 윤리. / 눅 10:30-37, 엡 4:31, 롬 1:14, 마 5:48.

 기독교 교리생활, 윤리

(눅 10:30-37, 엡 4:31, 롬 1:14, 마 5:48)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항상 두 가지로 되어 있다.

즉, 교리편생활 윤리편으로 되어있다.

[로마서] 1장∼11장 : 교리편, 12장∼16장 : 생활, 윤리편

그래서 교리편과 생활, 윤리편을 연결하는 접속사가 [그러므로]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전반부 (1장∼11장)에서 이렇게 구원의 진리를 깨달았으니,

후반부 (12장)부터는,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라는 말이다.

[에베소서] 경우에도 :

1장∼3장 : [교리편], 4장∼6장 : [생활 윤리편] 으로 되어 있다.

다른 서신들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교리생활 윤리의 관계 :

교리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 무슨 은혜를 베푸셨는지?

이것을 깨닫게 해 주는 증거와 말씀이 교리편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후반부의 생활 윤리편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둘 다 중요하다.

교리 없이 윤리가 있을 수 없고, 삶이 없는 교리공허할 뿐이다.

교리생활 윤리관계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교리는 사람 [몸의 뼈대]와 같고, 생활 윤리는 [살]에 해당된다.

뼈대가 없이 살만 있으면, 사람은 설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반대로, 뼈만 있고, 살이 없으면, 모양이 볼상스럽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은 의 균형과 조화가 있어야 하듯이,

기독교의 교리와 생활 윤리는 병행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은혜의 역사를 받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고 말씀도 듣고, 성경을 읽는 것이다.

오늘은 기독교의 생활 윤리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한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 윤리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1) 긍휼의 삶이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심 같이,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눅 10장)[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에 강도들을 만나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되었다. 그 때 마침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황급히 그냥 지나갔고, 레위인도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고,

주막으로 데려가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제사장레위인은 종교인이고,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들이 그냥 지나간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성전에 가서 제사를 집례해야 하는데 손에 를 묻치면,

정결법에 문제가 되니, 피하여 간 것 같다.

그들은 율법주의적 교리에 빠져서 피한 것이다.

율법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좋은 것이 아니다.

교리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교리주의는 좋은 것이 아니다.

권위도 마찬가지이다. 권위는 좋은 것이다. 권위가 있어야 한다.

스승의 권위, 부모의 권위, 목회자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

권위가 무너지면 중심을 잃고, 질서가 무너진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좋은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는 신비가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주의적 교리에 빠져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은 무엇이었는가? (33절)에 나온다.

(33절)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37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기에 기독교의 생활 윤리가 있다. 긍휼의 생활, 윤리이다.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심으로 인하여 얻게 된 것이다.

(마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해서 구하는 것 뿐이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뿐이다.

(시 123:3)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느 9: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주님의 성품을 본받아,

긍휼을 베푸는 생활 윤리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벧전 3:8-9)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엡 4:31)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서로 서로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풀며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이다.

(둘째로, 기독교인의 생활은)

2) 빚진 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라.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은 그 누군가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어서

믿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이 친구이든지, 교회 목사님이든지, 부모님이든지 나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들려 주어서 믿게 된 것이니, 복음의 빚진 자라는 말이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4)

예수 믿는 우리 모두는 복음의 빚을 진자들이다.

언더우드 선교사, 아펜셀라 선교사가 100여년 전에 열악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해 줌으로 인하여 우리가 예수 믿게 되었으니, 빚진 자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서 세계 모든 족속에게

이 복음의 빚을 갚으려고 선교사파송하고 있다.

기독교 복음의 진리(교리)를 듣고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활 윤리는

복음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받아 천국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직업은 다 달라도, 본업은 똑 같다.

복음 전해서, 영혼 구령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본업(本業)이다.

오래 전에 친구가 군에 입대했는데, 군의관(의사) 장교가 일등병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첫 마디가, “군의관은 내 부업이고, 내 본업예수 믿는 겁니다.”

말해서 놀랐다고 했다.

3)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불러 예수 믿게 하신 것은

그 아들의 성품을 닮게 하려고 부르셨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 믿어 영혼 구원은 받았다.

그러나 인격은 부족하고 허물이 많다.

그래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은혜를 계속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어떻게 우리 인간이 하나님처럼 온전해 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속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능력 속성 ②인격 속성이다.

능력 속성은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할 수 없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말씀하는 것은 인격 속성을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할 수 없다. (능력 속성)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성품을 추구할 수 있다.

그래서 같은 산상수훈의 말씀이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온전함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다.

(눅 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그러니까, (마태복음 5:48)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그렇게 자비로운 성품의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생활윤리이다..

(결 론)

무엇을 믿느냐? 하는 교리도 중요하다.

잘못된 교리를 믿으면 이단이 되고, 구원도 받지 못한다.

그래서 교리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도 정말 중요하다.

기독교 교리생활 윤리의 관계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이다.

★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활편)

1) 긍휼(矜恤)실천하는 생활이다.

2) 복음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삶이다.

3)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실천하며 추구해야 하는 생활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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