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6일 토요일

복음의 특성 / 고전 1:18-31, 고후 12:10.

 복음 특성 (고전 1:18-31, 고후 12:10)

우리가 믿고 구원받게 된, 복음그 특성은 무엇인가?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전파해 온

복음 (유앙겔리온) 에는 특성이 있다.

이 귀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특성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약함이다.

기독교 복음의 특성은 약함이다.

할 때 하다. 이러한 역설이 성경의 진리이고, 사도 바울의 선언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회는 너무 해졌다.

너무 지혜로워 졌다. 너무 힘이 세졌다.

설교도 너무 멋지고, 지식 너무 풍부하고, 교회가 너무 힘이 세졌다.

(예화) 중세 13세기 인노센트 3세 때 교회가 그랬다.

얼마나 교회가 힘이 세졌는지 황제가 교회에 허락 없이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그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지만, 너무 커진 것 같다.

영국의 세계적인 지도자 존 스타트 박사는 3년 전에 영국 성경 사경회에서

“기독교의 근본 진리 중에 하나는 약함어리석음에 있다.

십자가 복음 자체가 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라고 주제 강의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은혜받았다고 한다.

바울도 약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떨었고 약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게는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했다. (고전 1:23)

복음을 전하는 자도 약해야 한다.

바울로 약했다. 낫지 않는 병을 가지고 있었다.

(고전 1:25)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

사람보다 지혜롭다고 했다. 십자가 자체가 약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약하게 되셨다. 예수님이 약해지셨다. 바울도 나는 했다.

이것이 복음의 특성이다.

사도바울은 전도할 때 헬라의 지혜로 설교를 포장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로마의 웅변술로 꾸미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있는 그대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약한 것 그대로, 어리석은 그대로 전한다.

헬라인들은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한 것이라고 배척하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하지만 (고전 1:22),

사도 바울은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있는 그대로 전하노라.”고 했다.

이 말은, 설교를 세상 지혜로 꾸미지 않고, 너무 인간적으로 유창하고 멋지게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다.

설교를 너무 강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다.

복음이 약하고 복음 전도자도 너무 강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에 하고 두려워했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강조했다.

왜 너희들은 바울 나 자신굉장한 사람처럼 여기느냐?

아볼로대단한 사람처럼 여기느냐?

게바굉장한 사람처럼 여기느냐?

그러면서 그와 같은 시도를 단호하게 바울은 거부했다.

바울은 자신아볼로게바에 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과 아볼로, 우리는 정말 Nothing 이다.

멸시적인 용어를 자신들에게 사용했다.

(고전 4:13)에서 나는 만물의 찌끼와 같다.

찌끼가장 낮고 천한 신분을 말한다. 찌끼보다 더 낮아질 수 없다.

시궁창에 버려진 찌꺼기와 같다.

자기를 만물의 찌꺼기격하(格下)시켰다.

그러나, 바울은 약한 것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약한 것자랑한다. 약한 것기뻐한다고 했다.

예수님의 능력은 내가 약할 때 하게 나타나고 온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약한 것과 부족한 것을 기뻐하고, 자랑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내가 약할 때 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너무 부자가 된 것 같다.

너무 이 쎄지고, 도 너무 많아지고, 해진 것 같다.

마치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노라”(계 3:17) 고 말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닮아가고 있지 않는가? 라는 두려운 생각을 하게 된다.

바울은 복음 자체하고, 복음 전하는 사람약해야 하고,

복음을 받는 사람도 약해야 된다고 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6)

우리나라 평안북도에 한국교회의 부흥을 주신 이유도 아마 그랬을지도 모른다.

초기 평안도는 멸시를 당하던 곳이다. 가난하고 힘이 없었다.

초기 선교사 중에 한 사람인 블래어 박사korea Penticost라는 책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한구 초대 교회 시절에 청년 한 사람이 자기에게 와서 말했다.

“블레어 선교사님, 한국 사람처럼 불행하고 불쌍하고 소망 없는 민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을 때, 블레어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적으로는 약하고 힘이 없고 소망이 없는 한국 사람들에게

축복의 손길, 부흥의 손길을 펴신 것 같다.”라고 기록을 했다.

결국 그 후에,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놀랄만한 성장을 이루었고

그 결과로 민족과 나라까지 축복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사이에 한국 교회는 너무 커지고 너무 해졌다.

지도자들을 우상화하고 교직을 받들게 되었다.

(예화) 어떤 한국 교회 지도급의 목사님에게 후배들이 찾아갔는데 :

“내가 인터뷰를 하면 시간당 얼마나 비싼 돈을 받는지 아느냐? 하면서

당신은 나를 이렇게 공짜로 만나는 것이 큰 행운이라고 하더랍니다.

(웃자고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힘은 있는 것 같은데 복음의 능력은 상실했고 사회로부터 실망과 불신을 받게 되었다.

(물론 한국 교회가 잘한 것도 없지는 않다.)

문제는 지금 한국 교회가 너무 강해져서 비판의 소리를 듣고 멸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서 좀 더 낮아지고, 약해지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렇습니다.

지금이야말로 : ”복음의 본질 중에 하나는 약함과 어리석음을 도로 찾고

회복할 때가 아닌가? 항복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약함과 우리의 어리석음을 회복할 때라고 생각한다.

설교자를 존경은 하되, 우상시하면 안 된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복음을 받는 자도 약해야 한다. 목사도, 성도도 약해야 한다.

바울은 약함을 기뻐한다고 했다.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라고 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복음특성약함이다.

복음은 약하지만, 가장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문제는 그 능력이 내가 강하게 드러날 때는 나타나지 않고,

내가 약해 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착함이다.

해지니까 착해진다. 해지면 착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인자하심이 풍성하시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 착한 행실을 나타내라고 하셨다.(마 5:16)

예수 믿은지 오래 되었어도 [브르 독] 심술궂게 살면 안된다.

종교개혁의 전통이 귀하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등이 복음의 중심이다.

문제는 으로만 오직 믿음, 믿음, 믿음 그러다가 삶이 없어졌고,

은혜, 은혜, 은혜 그러다가 자기 책임망각했다.

은혜만 받으면 별짓 다해도 된다는 식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행함도 없어지고 인간의 책임도 없어지고, 도 없어지지 않았는가?

한국 교회 설교, 신학, 은혜 체험, 물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설교가 너무 풍성하고, 신학이 너무 풍성하고,

은혜 체험이 너무 풍성한 나머지 말만 잘하게 되지 않았는가?

지식만 너무 풍성하여 이 망가졌지 않았는가?

비판만 남고, 감정만 풍부한 이기주의자들이 되지 않았는가?

존경하는 신학교 교수님, 김명혁박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한 동안 은혜로운 설교자를 너무 흠모하였고,

풍부한 신학자를 너무 존경하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설교에 불과하다. 신학에 불과 하다. 체험에 불과하다.

그러면 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닮는 삶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셨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신학도 귀하고, 설교도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귀한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귀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장기려 박사를, 이기풍 목사를 존경하게 되었고,

송명희시인을 존경하게 되었고, 성프렌시스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행 1:1) 무릇 예수의 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라고 했다.

예수님으로 먼저 본(本)을 보이시며,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본래 말씀이셨으나(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말씀이 우리 인간의 삶이 되었다는 뜻이 들어있다.

말씀으로만 있지 않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삶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도 귀하지만, 사랑의 삶, 용서의 삶, 희생의 삶을 사셨다.

너희는 세상에서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회 복음이 아니다. 영광 복음이다. 은혜의 복음이다.

사도행전은 복음 확장의 역사이다. 선교의 역사이다.

물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바울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이 전파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길을 미리 예비한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착한 삶이 있었다.

베드로가 가기 전에 도르가의 착한 삶이 있었고, 착한 행실을 통하여 이미 욥바에

미리 복음 사역의 문이 열려 있었다.

또한, 베드로가 가이샤라에 가기 전에 이미 고넬료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이미 고넬료 가정에 복음 전파의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Pre-evangelism 이다.

도르가나, 고넬료는 인도주의적인 착함이 아니고 하나님께 상달된 삶이었다..

내가 네 구제를 받았다. 그래서 베드로를 보낸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을 통하여 복음이 전달받을 수 있게 준비하신 것이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성령믿음이 충만했지만 그 이전에 그는 착한 사람이고 했다.

착한 사람인데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했다.

내가 아는 어떤 성도는 착한 것이 큰 장점이다.

그는 그렇게 많이 배운 자가 아니다. 큰 리더쉽도 없다.

모든 면에서 부족한 듯하게 보인다.

그런데 너무 착하고 온유하다. 착함에 있어서는 굉장한 부자이다.

그는 결국 그 착함 때문에 마지막에 승리한다.

장기려 박사를 아십니까?

그가 죽었을 때는 한국 사람은 작은 예수가 죽었다고 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그들은 신학이 아니고 교리가 아니고

예수님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복음특성약함이고, 착함이다.

3) 주변 지향적이다.

약해지고 착해지니까, 소외된 사람에게 달려간다. 불쌍한 사람을 찾아간다.

그것이 바로 소외된 변두리 인생을 향하여 달려게 된다.

이것이 복음의 특징이다.

복음은 주변 지향적인 인생들에게 찾아가는 복음이다.

이 말은 복음자기 중심, 중앙 집중이 아니라 주변으로 나가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서울로, 서울로, 거지 노릇을 해도 서울로 가자는 것이 한국 사회였다.

시골을 향하여 가는 사람이 없었다. 키워놓으면 대도시로 가 버린다.

그러다 보니 서울은 초만원이고 시골은 사람이 없다.

우리 한국 민족은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 때문에 그리고, 유교라는 나 중심,

가문 중심적인 전통 때문에 개인중심, 가문중심, 지역중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서울출신, 시골출신, 민족 중심의 특징이 어느 세계민족보다 강하다.

그것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발 못 붙이는 나라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한국이라고 한다.

China Town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다 있는데 유일하게 한국에는 없다.

그렇게 우리는 배타적이다.

우리가 받은 축복이나, 영적인 풍성함이 흘러넘쳐서 주변으로 나아가야 한다.

소외된 변두리 인생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복음 내 것, 내 가정, 내 민족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나“를 뛰어 넘어야 한다. 나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복음경상도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전라도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미국에만 국한 된 것도 아니다.

복음은 지역도 뛰어넘고, 나라와 민족도 뛰어넘어야 한다.

그렇지만, 주변 지향적이라는 말은 어느 민족이나 어느 사회에 들어가서

살면서도 나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들에게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하면서, 세상에 동화되지 말아야 한다.

나의 본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마치, 소금과 같다. 소금은 녹아서 없어져도 소금의 짠 맛을 잃지 않는다.

소금이 물에 들어가서 녹아지면 없어진다.

그러나 그 물을 다시 햇빛에 말리면 물은 다 증발하지만, 소금은 그대로 남는다.

우리가 복음은 전하는데 어느 곳으로 들어가든지 그 민족의 풍습과 법에

잘 적응하여 살면서도 복음의 진리의 본질은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Incarnation)하여 인간으로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죄인들 속에 들어오셔서 함께 사시면서 그들을 변화시키셨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불러서 훈련시키시고, 세상으로 보내셨다.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베드로는 이방 사람,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시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요나를 불러서 “니느웨로 가라” 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결코 이스라엘 중심이 아니다. 이방으로 향하노라고 했다.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은 이유도 복음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흩으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우리 나라에 적용하면, 경상도 중심도 아니고, 전라도 중심도 아니고,

어느 도시 중심도 아니고, 서울 중심도 아니고 한국 중심도 아니다.

패트릭의 아일랜드 선교사는 해적이 자기를 잡아가서 6년 동안 노예로 고통을 준

그 곳을 향하여 복음을 들고 들어갔다.

아펜셀러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

한국은 그 당시 주변 국가였습니다.

선교의 역사는 주변 국가를 향한 것이다.

(결 론)

복음특성은 무엇인가?

1) 약함이다.

십자가는 약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약한 것이고 착한 것이다.

복음은 약하지만, 가장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문제는 그 능력이 내가 강하게 드러날 때는 나타나지 않고,

내가 약해 질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2) 착함이다.

해지니까 착해진다. 해지면 착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심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착하신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너희 착한 행실을 나타내라고 하셨다.(마 5:16)

3) 주변 지향적이다.

약해지고 착해지니까, 소외된 사람에게 달려간다. 불쌍한 사람을 찾아간다.

그것이 바로 소외된 변두리 인생을 향하여 달려게 된다.

이 귀한 복음의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은혜로운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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