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고후 12:1-6)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의 영혼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의 영혼이 육신의 장막을 벗게 되었을 때,
주님이 예비 해 놓으신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천국은 어떤 곳인가?
천국이 천국 되는 것은 우리 주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이다.(계21:3-4)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한번은 교회에서 영화 촬영이 있었다.
엑스트라와 그 교회 성도들을 양쪽으로 앉혔다. 카메라가 돈다.
이상한 것은 성도들의 표정과 엑스트라 불신자인, 그들의 표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모르게 평안이 있다.
한 사람씩 볼 때는 잘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넣고 보니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지어낸 이야기 같나요? 아니면 진짜 이야기 같나요?
여러분들도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이런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참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 하는 간증과 체험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2절) 하나님은 아시고,
(6절) 내가 참말을 함이라. 고 했다.
바울이 말하는 주의 환상과 계시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1) 바울이 체험하고, 간증하고 있는 셋째 하늘, 낙원은 존재한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신비한 영적 경험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어디를 다녀왔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1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절)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지라.
(3절) 낙원에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고, 그 곳을 낙원이라고 말했다.
[하늘에 대한 히브리식 사고(思考)]
1) 1층천 : 공중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는 푸른 하늘)
2) 2층천 : 수 많은 별들이 있는 하늘.
3) 3층천 : 천사와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곳.
스데반집사가 순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행 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여기에 [하늘이 열리고] : 이 말은 3층천, 하늘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 곳은 인간의 언어로 가히 표현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여기의 낙원은 천국이다. 구별할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이, 바울이 3층천, 낙원, 천국에 대한 영적 체험을 하고 간증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인간의 언어와 상상력으로는 설명과 표현이 불가능한 신비롭고 놀라운 세계이다.
(예화) 바다 속의 가물치가 실수로 물 밖으로 잠깐 올라갔다가 쑥 내려 갔다.
그리고 다른 가물치들에게 설명을 한다.
이 물 속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
푸른 하늘이 있고, 그 공중에는 새들과 나비가 날고, 아름다운 향기 나는 꽃들을 보았어...
어떻게 그것을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다녀온 낙원은 이 땅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 지옥도 마찬가지다.
불과 유황불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옥은 어둡다고 했다.
무저갱 (눅8:31, 계9:1,2,11, 20:3)은 밑창이 없는 깊은 구덩이란 뜻 이다.
그런데 떨어진다.
(눅 8:31) 귀신들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
(계 9:2)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더라.
(계 9:11)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
(계 20: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이상의 말씀에서 분명히 무저갱도 있고, 음부와 지옥도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천국(낙원)과 지옥(음부)을 분명하게
말씀하면서 부자가 죽어 음부에 떨어져 고통 중에 있는 모습을 말씀해 주셨다.
존재하지도 않는 음부와 지옥을 주님이 말씀하셨겠는가?
가끔 보면 여호와의 증인(이단)들처럼 지옥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가) 그들의 주장은 :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무서운 영원한 지옥을 허락하시겠는가? 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부정하는 죄악이고 심판받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들의 주장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다.
복음은 내세 문제만을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인데,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사는
그 자체가 이미 지옥이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내세의 천국과 지옥을 부정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과 무서운 심판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고 계시해 주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고 전해야 한다.
나의 스승이신 정암, 박윤선박사님께서 이것을 [계시의존사색]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내가 안 믿고 싶은 것은 안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성경 그대로 믿는 것이 참 신앙이다.
2) 바울은 영적 체험에 대해서 ( 자랑 )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3째 하늘의 체험을 바울은 [내가] 라고 말하지 않고 3인칭 주어로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체험이 자기 자랑이 되지 않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참으로 귀중한 자세이다.
사람들은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4년 동안이나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6절)고 하였다.
바울의 낙원 경험은 자신의 소원이나 의지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체험이 되었던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러한 체험은 불가항력적인 체험이다.
그래서 (2절)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말하고 있다.
이끌려 수동적으로 간 것이지, 자신의 의지로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체험해 보려고 하면 위험한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되는 것이다.
[입신] 같은 것을 해서 천국을 가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적인 욕심으로 이런 것을 위해서는 기도하거나, 노력해서도 안 된다.
입신을 경계해야 한다.
성경 요한 계시록에 나와 있으니, 그 말씀 믿으면 된다.
바울의 경우는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끌려 갔던 것이다.
바울이 언제 이런 경험을 했을까?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아마도 (행 14:19)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돌에 맞아 쓰러졌다.
사람들은 죽은 줄 알고 시체를 성 밖으로 끌어 내쳤다.
아마도 그 때 경험하지 않았을까? 성경학자들은 추측한다.
가장 아프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려고 베푸신 은혜인 것 같다.
3) 그렇다면, 나의 가는 이 길 ( 끝 )에 가서, 누구를 만나게 될 것인가?
오늘 이 말씀의 핵심이 여기 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
첫째로, 천국과 낙원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로,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와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의 인생이 끝 날, 날이 올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참 말을 하고 있다고 자신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땅의 언어로는 다 표현 할 수 없는 아름답고 영광스런 천국은 정말 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티브 혹킨 박사 라는 사람은 :
“천국 이야기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동화일 뿐이다.”라고
정말 정신없는 말을 했다.
똑똑하고 분명히 들어세요.
죽음은 멸절(滅絶)이 아니다. 죽음으로 끝이 아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편 강도에게 말씀하셨다.
(눅 23:43)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계 2:7)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낙원 = 천국이고,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 천국이다.
(예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 2,000명에게
인터뷰를 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했다는 공통점 2가지가 나왔다.
① “죽은 자기가 자기 시신(屍身)을 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시체를 놓고 우는 가족을 본다는 것이다.
② “죽음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이더라” 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의 세계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행 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빌 1:23-24) 내가 (육신과 영혼)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 바울의 소원은 몸을 떠나, 그 영혼이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육체 안에 아직 있다면 빌립보교인들을 위하여는 유익하다는 말이다.
바울이 그의 생애를 마치게 되었을 때, 순교를 앞에 두고, 기대와 소망에 부풀어서 말했다.
(딤후 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얼마나 죽음 앞에서 기대와 소망이 가득찬 멋진 말인가?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기대감,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
우리도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결 론)
만일, 인간이 이 세상의 삶으로 끝이라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면 된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을 마치는 날 영광스런 천국이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모든 환난과 고난을 이겨내는 것이다.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이 길을 가는 것이다.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실 것을 믿기에,
환난과 고난과 억울함을 참아가며 사는 것이다.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께서 내 영혼을 부르시는 그 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가장 밝고 환한 모습으로 나를 맞이해 주실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복락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 멘)
(다같이 일어나서 찬양합시다.)
♬ 주님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가리라.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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