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9일 화요일

“마침내” 이루시는 하나님" / 창 12:1-9 아브라함의 믿음 (1)

 “마침내” 이루시는 하나님 (창 12:1-9)

아브라함의 믿음 (1)


성경믿음의 대표적인 인물아브라함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임상적 본보기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이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고 (롬 4:11)

신약 성경 첫 페이지는 아브라함이란 인물과 더불어 시작된다.

(갈 3:29)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이며,

또, 아브라함이 받았던이 우리의 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붙여졌던 많은 별명들이 있으나, 가장 영광스러운 별명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벗이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워졌던 호칭이다.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무려 74번이나 등장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무엇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이냐? 는 명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추적함으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와같이 아브라함은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 준 신앙의 모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본보기(Model)라는 말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너무 너무 위대하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와 동일시(identify)시키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렇게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이 되기까지는 많은 실패도 있었고, 고민갈등도 있었다.

그에게도 많은 변화의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이 우리와 다른 성정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우리와 다른 특별한 믿음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어떠한 사람도 특별한 사람은 없다.

성경에 나오는 특별하게 보이는 사람은 특별하게 보일 뿐이지,

사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이 그런 특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까지는 굉장한 갈등실패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도 역시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고,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서 연구할 때, 대표적으로 쳐드는 성경구절이 있다.

(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했다.

성경 구절아브라함은 얼마나 믿음순종에 있어서 우리의 본보기

되었는가? 를 생각하게 한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 할 땅으로 가라.” 고 하시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이 사실 하나만 갖고, 곧장 모든 것을 버리고,

군소리 없이, 떠나버린 사람, 아브라함, 그는 얼마나 믿음의 사람이며,

얼마나 순종의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히 11:8)말씀의 증언은 결과에서 본, 그의 믿음이고,

나중에 정리하면서, 본 믿음이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나타난 믿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히브리서의 그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이 그 믿음순종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갈등을 겪었는가 하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무시한 채,

결론만 갖고 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의 나중 믿음이 아니라(창 22장),

처음을 보자는 것이다.

★ 과연, 아브라함의 처음 믿음처음 순종은 어떠했는가?

1) 우선, 오늘 본문 (창 12:1-4)을 봅시다.

(창 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이 본문의 배경은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인가? 하란인가? 하란이다.

하나님이 떠나가라 하시니, 떠나갔다고 생각하기 쉽다.

(4절) :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다.” 고 했다.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걸고, 떠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만 가지고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순종을 잘 했는지 잘 모른다.

(행 7:1-3)을 보자.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하란에 있기 전(前)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말씀은, 먼 훗날 아브라함의 사건을 되돌이켜 조명하면서, 좀 더 자세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나 순종했는지를 보여 준다.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셨던 곳은 “메소보다미아” 지방의

“갈대아 우르”라는 곳이다. 여기가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느 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라고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신 땅은 어떤 땅인가? 가나안 땅이다.

(창 11:31下)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곧장,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까? No, 아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일단 하란까지는 와서 거기에 머무른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 (창 12:1)하란이다.

아브라함이 그랬을까요?

지리적으로 볼 때,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길이 좋고 평탄한 길이다. 유프라데스 강을 끼고 북서쪽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좋은 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이제부터 가나안 땅까지 가는 길의 어려움은 하란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 머물렀다고 생각하십니까? (상당한 기간 머물렀다)

그랬을까요? 고생하기 싫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떠났다. 그러나 온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출발은 했다.

그러나, 중간에서 머뭇거린 장소가 있었고, 도중에 지체했던 시간이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음을 잘 안다.

이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저 좋은 천국예비하셨다. 이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놀라운 약속을 갖고 있다. 이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고생은 싫은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순종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이제부터, 하란 땅을 떠나, 겪어야 할 모진 고생피하고 싶은 것이다.

영생도 믿고, 천국의 상급도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당장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고생과 지불해야 하는 댓가는

아직도 원하지 않느다는 말이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주저함이 있고,

아브라함의 발걸음을 하란에서 머물게 한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기까지 걸렸던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나이가 60세이다.

(참고) : (창 11:26) 데라가 70세에 아브라함을 낳고, (32절) 데라가 205세에 죽음.

205 ‒70 = 135세 (데라는 아브라함 낳고 더 삶)

(창 12:4)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 75세이다.

그러므로 135 –75 = 60세가 된다.

(창 12:4)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가 75세라고 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에서 시작하여 하란을 떠날 때까지의 세월은 15년이다.

그 중에 하란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고, 쉽게 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 15년의 세월을 거의 다 하란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하란” 이라는 땅,

그의 발걸음을 묶어 놓고 있는 땅,

신앙의 전진을 정지시키고 있은 땅, 하란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머뭇거리면서 약속의 땅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약 15년을 보냈고,

15년 동안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대로 두셨다.

하나님은 그가 스스로 떠나기를 기리리셨다.

하나님은 참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계획과 목적이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 앞에,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시었습니다.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나 뉘우치는 눈물로 주여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대포기하지 않으시고,

참고 기다리고 계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방향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머리가나안 땅향하고 있다.

아비 본토 친척 집을 떠난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 없이 살던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도 사실이다.

안 변한 것이 아니다.

세계관이 변했고, 가치관이 변했고,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선가 아브라함처럼 머뭇거리고 있는 당신의 하란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섬기지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렸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신앙의 발걸음묶어 놓고 있는

세상의 안일육신의 정욕세상의 유혹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발걸음이 “하란”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참으시고, 우리가 스스로 떠나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어느덧,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아브라함이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던, 15년의 세월

낭비된 세월이고, 잃어버린 세월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머무는 동안, 창조적인 일을 했다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것은 그냥 잃어버린 세월이었고, 낭비된 세월일 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하란”이라는 뜻은 “열매가 없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보내 버리는 열매없는 세월,

하란 땅에서의 세월이 없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오래 오래 참고, 기다리시다가 드디어, 손을 대기 시작하신다.

(창 11:32) 데라205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는다.

때가 되어 죽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죽이신 것이다.

(행 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란 땅떠난 것이 아버지 데라가 죽었을 때이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아버지 “데라” 였는지 모른다.

“데라” 란 뜻은 “연기하다”라는 뜻이다.

여러분의 데라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데라무엇입니까?

데라 때문에 아브라함의 발걸음이 연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데라가 죽는다.

데라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드디어, 어느 날 :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방해하는 그것을 파괴하는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

(따라합시다.)

내가 헐지 않으면, 하나님이 허신다.

내가 나의 신앙생활의 방해요소를 치우지 않고, 온전한 순종이 자꾸 자꾸 지연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모든 것을 치우시는 그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이 손을 대서 치움을 받게 되면, 인생이 고달퍼진다.

그 날이 오기 전에, 그렇게 가슴 아픈 그 날이 오기 전에, 스스로 치우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 신앙의 발걸음이 다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창 12:5)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행 7: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주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쉽게 기록하고 있으나, 아브라함 편에서 볼 때

얼마나 지나간 세월이 기가 막혔겠습니까?

분명하게 기억하세요.

아브라함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마침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순종케 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설복이었다.

순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

(예화) 양파 밭에서 양파 훔쳐 먹다가 주인에게 걸렸다.

그래서 을 받는데, 3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양파 100개 먹을래? 빳다 100대 맞을래? 100만원 벌금 낼래?

그래서 생각해 보니가 빳다 100대 맞으려니 너무 아플 것 같고,,

100만원 내려려 돈이 아까워서, 양파 100개 먹겠다고 했다.

그래서 양파를 먹는데 10개도 먹기 전에 매워서 못 먹겠더라.

그냥 빳다 100대 맞을 게요 했다.

50대 맞으니, 너무 아퍼서 도저히 더 못 맞겠더라.

그래서 100만원 내고 왔더랍니다.

아예, 처음부터 100만원 내면, 고생 안할 것을 고생만 더 한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면 고생도 안하고 복 받는다.

(예화) 굴종, 항복, 복종, 순종의 차이를 알지요?

굴종은 힘이 없어, 비굴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항복은 강도가 “손 올려” 하면 죽기 싫어서 손 올리고 항복한다.

복종은 군대에서 하기 싫어도 따라야 한다.

순종은 내가 좋아서 따르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순종한다.

어느 것이 가장 좋은가?

하나님께 처음부터 순종하는 것이 축복이다.

하나님은 마침내, 결국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까지

이끄시고야 마셨던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를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해서 처음으로 감사의 제단을 쌓는다.(7절)

아브라함 생애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제단이다.

그는 이제 안 것이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안 것이다.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잃는 이 가슴 아픈 일을 통해서라도, 아브라함을 깨우쳐 주시고,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그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까지

이끄시고야 만다는 사실이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의 자리까지 오도록 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요. 여기에 아쉬움이 있다.

아브라함이 조금 더 일찍 순종했더라면 :

15년의 세월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좀 더 일찍 순종했더라면, 아버지 데라의 죽음을 피하고도,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일찍, 주님 앞에 두 손들고, 순종했더라면....?

15년의 낭비된 세월을 영광스럽고 보람된 세월로 만들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결 론)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부터 100% 온전했던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도 신앙의 갈등이 있었고, 방황도 있었고, 고민도 있었고,

실패한 장소도 있었다.

그가 가나안 땅으로 가던 중, 그가 머뭇거렸던 “하란” 이라는 땅은 :

하나님의 뜻을 정지시켰던 땅, 아버지를 마침내 잃게 했던 땅,

귀한 세월을 낭비하며 보내던 하란의 땅이었다.

여러분의 신앙을 잡아 내리고, 머뭇거리게 하는 당신의 하란은 무엇입니까?

어서 속히, 그 하란에서 벗어나고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참고 계신다.

우리 스스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스스로 나오기를 거절할 때, 하나님은 마침내 강제로라도 이끌고

나오시고야 말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 사랑이 있다.

“데라”가 죽기를 기다리는 미련한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꼭, 큰 일을 당하고야 깨닫는 자가 되지 맙시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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