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부족함을 주신다.
사랑하는 자를 완전하게 안 하신다.
완전하게 안 하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에덴동산에도 한 가지를 부족하게 하셨다.
다윗에게도 압살롬이라는 가시를 주셨다.
예수님에게도 가룟 유다가 있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귀한 종이요.
가장 충성스런운 종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가시”를 주셨다.
가시는 아픈 것이다. 바울에게도 아픔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제거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3번이나 특별기도를 했다.
그러나 응답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너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 은혜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에게 있었던 그 가시가 뭐냐? 학자들마다 다르다.
그 중에 가장 유력한 견해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질, 또 하나는 간질병이라는 견해다.
바울이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으나, 자신의 병은 못 고칠 때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남은 가르치나 내 자식은 잘못 가르칠 때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간질병은 부끄러운 병이다.
설교하다가 갑자기 쓰러지기도 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 가시가 있었으나 그 가시로 인하여 잘못 된 적이 없고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시”가 있다.
문제는 그 가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그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느냐? 를 깨닫기만 하면
그 가시가 결코 손해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가시 때문에 백합화가 향기를 날리듯이 가정과 교회와 이 시대에
우리를 더욱 발전시키고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가시에 대한 해석이 문제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이것이 중요하다.
어떤 경제 연구소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 가장 행복한가? 조사했다.
영국 : 25%, 프랑스 : 16%, 일본과 독일사람 : 13%의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완전 행복, 100%의 사람은 없고, 그래도 가장 행복한 국민이 25%이랍니다.
하나님은 100% 짜리 행복, 100%의 은혜를 주시기 않는다.
신경통, 고혈압, 심장이 나쁘다.... 등 이런 것은 다 괜찮다.
왜냐하면, 한가지 씩은 다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문제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세상에 병 없는 사람 없다. 세상에 문제없는 완전한 가정은 없다.
그리고, 자기가 건강하면, 아내가 병이 있든지,
부부가 다 건강하면 자식이 병이 있든지,
자식이 문제 없으면 다른 면에서 어디엔가 또 아픔의 가시가 있다.
이 세상에서 완전하고 좋은 곳은 없다. 완전한 나라도 없다.
한 때는 미국이 좋다고 이민 와 봤지만 이 아름다운 미국에도 문제가 많다.
살인, 강도, 절도, 이혼, 마약, 음란 ... 등등 얼마나 문제가 많은가? 다 그런 것이다.
그래서 역이민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문제 없나요? 또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해답은 자기에게 달렸다. 자기 영혼에 달렸다.
가시를 소화하고 가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가시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예)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을 보라.
헬렌 켈러 여사 전기를 찾아 보라.
가시가 없는 완전한 곳에 살려고 하면 안 된다.
가정에 가시가 있다. 사업에도 가시가 있다.
삶에 가시가 있다. 영적으로도 가시가 있다.
이것을 없애려고 할 때부터 문제가 생긴다.
본문에는 가시를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해서 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주신 가시이니, 뽑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뽑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불행은 이 가시를 뽑아 없애려고 하여서 :
완전한 건강, 완전한 사랑, 완전한 기쁨, 100%의 행복을 누리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다.
에덴 동산에도 못 먹게한 선악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없애려고 할 때 사탄에게 속게 된 것이다.
모든 슬픔과 저주와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최고의 행복을 찾아 헤메는 현대인들을 위해서 마약이 기다리고 있다.
잠깐이지만 꿈꾸라는 것이다.
교인들도 최고의 신앙, 최고의 기적, 최상의 은사, 최고의 진리,
최고의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할 때 시험에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단에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미선교회에서는 1992년 10월 28일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며, 신도들을
유혹하며 34억원을 헌납하게 했다가 사기 혐의로 이장림목사는 구속되었다.
(인터넷 기사 참고함)
초대 교회도 억지로 풀다가 시험들었다. 재림의 날짜는 모르게 되어있다.
그러나 다 알려고 하다가 시험에 들고 사탄, 마귀에게 속는 것이다.
다 가질려 하고, 다 얻으려고 하면 사탄이 기다린다.
(잘 들으세요)
부족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내려오는 것이다.
부족한 가운데 찬송 부르며, 연약한 중에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그 이상을 찾으면, 마귀가 역사하는 것이다.
그 이상의 행복, 그 이상의 은사, 그 이상의 만족에는 “마귀”가 기다리고 있다.
부족한 가운데 자족할 줄 알아야 하고,
100%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게 되니, 오히려 감사한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 (빌 4:11-12)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사랑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가정에 만족을 느끼지 못 한다.
남편에게서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아내에게서 만족을 갖지 못한다.
아내에게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그 이상을 찾아 나서는 남편들을 위해서
술집이 기다리고 있고, 룸살롱이 기다리고, 창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또 남편에게서 부족한 점을 보고, 그 이상을 찾아 나서는 그런 부인들을
위해서는 어느 날 조용한 날에 제비들이 날아오는 것이다. (ㅋㅋ)
완전한 사랑, 완전한 행복, 완전한 쾌락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약(코케인)이 기다리고 있고,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완전한 남편, 완전한 아내가 어디 있나요?
그런 남편도 없고, 완전한 아내도 없다.
70-80점, 남편이면 굉장히 훌륭한 남편이다.
70-80점, 아내이면 대단히 좋은 아내이다.
완전한 인간은 없고, 100점짜리 남편도, 아내도 없다.
남편과 아내가 60점짜리라도 두 사람이 서로의 부족을 채워 가면서
120점으로 살면 대성공이고, 행복한 부부이다.
음식도 하나님이 주신 자연 그대로의 맛이 있다.
쓴맛, 단맛, 새콤, 달콤, 짭짤하고 은은한 맛 ... 다 다르다.
약간 모자란 듯한 그 맛이 좋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100% 맛만 찾아 다닌다.
완전한 음식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미원이 기다리고 화학 조미료가 기다리고 있다.
왜 하나님이 주신 자연 그대로의 그 맛을 좋아하지 않는가?
좀 시면 신맛 그대로, 좀 짜면 짠맛 그대로, 새콤하면 새콤한 맛 그대로,
매우면 매운맛 그대로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신 내 모습 그대로 주 받으시옵소서
좀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많다.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한 여름에 상추 쌈에, 풋 고추를 고추장에 푹 찍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나요?
꼭 몇십만원, 몇 백불 짜리를 먹어야 맛이 있고,
모든 음식이 준비된 뷔페 집에 가야 맛있나요?
부족함이 없는 뷔페 집은 오히려 손해다.
오히려 더 못 먹는다. 오히려 질려서 못 먹는다.
본전 생각나서 많이 먹고, 많이 먹었으니 배탈 난다.
그림도 훌륭한 작품은 옷 잘 입은 그림이 아니다.
애기 엎은 아주머니, 남루한 시골 아저씨, 밀레의 만종 같은 그림이 명화이다.
모자란 듯 하지만 은은한 것이 다 명작(名作)이다.
부족한 가운데 누리는 행복, 이것이 성도의 행복이요, 에덴의 행복이다.
집은 없지만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말 잘 듣습니다.
월급은 적지만 화목하게 살아 간다.
자녀는 없지만, 부부의 정이 많다.
남편은 없지만, 아이들이 착하고 건강하다.
돈은 없지만, 우리 가정은 주의 일 열심히 한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들이 아닌가?
얼마나 가시를 이기는 아름다운 고백인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행복을 누리는 자들의 고백입니까?
이것이 가시를 좋게 해석하는 삶이다.
가시 때문에 불행해 질 수 없는 삶이다.
사도 바울은 가시가 없기를 바랬으나, 가시가 은혜라는 것이다.
가시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의 족한 은혜” 라는 것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누구든지 어떤 가정이든지 가시는 다 있다.
그러나 그 가시 때문에 불행해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가시를 크게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시는 시험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 가시 때문에 내 교회, 내 가정, 내 건강, 내 영적인 삶이,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가시에 대하여 깨닫고 재해석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가시에 대하여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2가지)
(1)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신 [가시]임을 깨달았다 (7절)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도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공부도 많이했고,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가문도 좋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고,
바리새파 출신으로 율법에 능통했다.(빌 3:5)
인간적으로 정말 자랑할 것이 많다.
또한,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도 받은 은사도 많다.
영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다. 셋째 하늘까지 체험한 사람이다.(고후 12:1-4)
정말 교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시가 없으면 자고(自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 것이다.
자고(自高)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 교만해 지는 것이다.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해지면 망하니까 겸손하라고 주신 것이다.
나는 온전하다. 나는 최고다. 나는 다 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진다.
하나님은 바울이 스스로 일생동안 [나는 다 되었다. 이만하면 됐다]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나는 최고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게 하시려고 가시를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한 가지 없는 것 때문에, 그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한가지 가시 때문에 오히려 겸손할 수 있었고, 멸망 받지 않고
영원한 은혜를 받았다. 귀한 종이 되었다.
성도는 일생 예수를 믿어도 내 믿음이 부족한 줄 알아야 한다.
일생 교회 나와도 늘 부족한 줄 알고 나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것ㅇ;다.
(2) 하나님만을 더욱 의지하라고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9, 10절)
아이는 아프기 때문에 엄마를 찾는 것처럼, 약하기 때문에 강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붙들라고 가시를 주셨음을 깨달았다.
가시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엎드리게 되고, 가시 때문에 매어 달리게 되고,
가시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고, 의지하는 내 주(主)를 더욱 의지함으로
강하고 능력있는 성도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 (10절)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9절)고 고백하게 된 것이다.
내가 약한 줄 알 때, 마귀가 틈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다 되었다. 섰다 할 때 넘어지게 된다.
약함으로 주를 의지하고, 성령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된다.
연약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도와 주실 것이다.
낮은 곳에 은혜가 임하고, 가시가 있는 자에게 더 큰 은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땅도 공평하게 하셨다.
땅이 좋으면, 열매는 많으나, 지하자원이 없다.
땅이 안좋으면, 시베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알라스카에 지하자원이 많다. 석유가 많다.
부족한 곳에 은혜가 더 많다.
(결 론)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했던 종, 다윗에게도 압살롬이라는 가시가 있었다.
그 가시 때문에 울고 울고, 쫒겨다니면서 시편을 기록했고, 믿음이 성숙해져 갔다.
모세에게는 “바로”가 있었다.
에스더에게는 “하만”이라는 가시가 있었다.
모든 사람은 몸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어느 면에서든지 가시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가시를 꽂아 주셨다.
그러나 그 가시 때문에 잘못되지 않는다.
그 가시 때문에 손해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이 만세 전에 택하시고, 하나님이 귀하게 들어 쓰는 사람은,
그 가시 때문에 더 잘되고, 그 가시 때문에 약한데서 강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9절)
그 가시 때문에 더 큰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더 귀하게
쓰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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