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6일 토요일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 빌 3:12-14.

 뒤엣 것잊어버리고. (빌 3:12-14)

이제 우리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였다.

우리의 인생도 그 언젠가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전 7:8) 일의 이 시작보다 낫다 고 했다.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고 좋아야 할 것이다.

공부를 하든지, 운동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사람을 사귀든지 마지막이 좋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더욱 더 그렇다.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싸움 잘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마친 후에

영광스런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인생의 후반전종반전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지혜를 말씀하고 있다.

즉, 지나간 과거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미래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다.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창 12:1) 너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과거에 우상을 섬기던 아비 집을 떠나고, 내가 지시하는 새로운 세계로 가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아브라함 인생의 새로운 푯대가 되었고, 그 푯대를 바라보면서

역경을 극복하며 선민의 조상이 된 것이다.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결단을 배우며 우리도 남은 생애를 잘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1) 뒤엣 것잊어버리라는 것이다. (13절)

(13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망년회(忘年會) : 잊을 망, 해년, 모일 회 이다.

뒤엣 것을 다 잊고 풀어버리자는 말이다.

뒤엣 것에 잘한 것은 교만하게 만들고, 잘못했던 것은 낙심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지나간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을 향개 가는 것이 지혜이다.

인간사(人間事) 중에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잊어야 할 것이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된다.

(시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또한, 부모님의 은혜, 이웃의 은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배은망덕(背恩忘德) : 은혜를 배반하고 은덕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피해상처는 잊어버려야 한다.

(아랍 속담) 은혜에 새기고, 원한모래에 새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광야를 지나가면서 가장 잘못했던 죄는 :

하나님께 불평, 원망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종, 모세를 원망한 죄이다.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양식이 없다고 원망하고,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더 좋았다고 원망했다. 그들은 잊어야 할 애굽을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구원의 은혜는 잊었다.

우리가 정말, 잊어서 안 될 것은 구원의 은혜이다.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망각되고, 잊어버리는 것도 축복이다.

만일 과거의 모든 일들을 잊지 못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정신이상자가 될 것이다.

밤에 잘 때에도, 낮의 일들을 다 잊고 잘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새 힘을 얻고 산다.

육신의 병도 회복되면 그 아픔을 잊는다.

산모가 아기 낳을 때 고통스러워 다시는 애기 안난다고 하다가도,

출산의 고통을 잊고 새 아기를 출산한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고통을 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잊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망각큰 은혜이다.

(사 43:18-19) 너희는 이전 일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잊는다] Forget = For + get : 이 말은 얻기 위한 것이다.

잊어버리면 얻는 것도 있다.

이 시간, 과거의 모든 어두웠던 것들을 다 잊어버리기 바랍니다.

(눅 9: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예화) 운전 할 때 백밀러만 보면 사고 난다.

◉ 그러면 어떻게 과거를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잊어버리자고 하면 오히려 더 생생하게 기억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과거를 하나님께 맡김으로 잊을 수 있다.

그리고 앞의 목표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살면 과거가 잊어진다.

죄 짓고 잘못한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의 피 아래 있는 내 죄는 볼 수 없다.

이미 지나간 것을 붙잡고 과거에 매여 사는 것은 큰 낭비이다.

(2) 현재에 대한 생각이다 (12절)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즉, 사도 바울은 현재 아직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온전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에 있어서는 자만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만은 곧 실패이다. 교만은 패망의 앞잡이다.

그리고 절망도, 교만도 다 불신앙이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쓸 때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회개한 후에 오랜 세월이 흐른 때이다.

3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교회도 많이 세웠다.

목회서신을 제외하고 다른 서신서를 다 쓴 때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 바울의 연세도 높고, 노숙한 사도이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겸손히 고백하고 있다.

◉ 그러면 무엇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아직 미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고전 15:8-9)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엡 3:8)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딤전 1:15)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말했다.

신앙이 더 깊어질수록 자신의 부족허물을 더 많이 느끼게 된 것이다.

완전주의(Perfectionism) 란 것이 있다.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되어 무죄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 교부 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재 세례파, 미국의 퀘이커파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완전해 질 수 없다.

[로마서]구원론을 말씀하는 책이다.

로마서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1)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칭의(稱義)의 단계 (롬 3:21-5:21)

2) 거룩한 생활에 힘쓰는 성결(聖潔)의 단계 (롬 6:1-8:17)

3) 몸의 변화를 받는 영화(榮化)의 단계 (롬 8:18-19)

의롭다고 함을 받는 칭의는 믿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결현재 진행중이다. 미완성 중이다.

그리고 영화는 미래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혼은 구원받았지만, 성화영화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바울은 신앙이나 인격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교만한 모습 없이,

현재미완성된 자신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또한 [미래의 상급]아직 받지 못했다.

달음질의 마지막 종착점에 이르면 하나님이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이 기다리고 있다.

구원받은 것만으로도 물론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그가 상급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고후 5:10)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구원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상급행한 대로 받는다.

이상의 모든 것들은 사도 바울이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들이다.

(예화) 독일에 “쾨룬 대성당”이 있다.

아직 한번도 건물이 완성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너무 큰 건물이기 때문에 언제 가든지 어느 부분은 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상태가 그렇다.

어느 하나 노력하면 다른 부분이 탈이 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온전히 이루지못한 미완성의 자신을 직시하면서 달려가는 겸손한 자만

앞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3) 미래에 대하여 :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 (14절)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미래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

[좇아가노라 = 디오포]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는 말이다.

성경은 성도의 신앙생활을 마치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경주자에 비유하고 있다.

달려가는 사람은 반드시 푯대가 있다. 목표지점이 있다. 골인지점이 있다.

푯대가 있고, 그 다음에는 그 목적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방법은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얼마를 뛰었던지 간에 앞의 남은 코스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자만하지도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목표지점을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생의 목적이 있다. 생의 푯대가 있다.

그 다음에는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 사도 바울의 푯대는 무엇인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붙잡혔다.

예수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했다. (12절)

또 하나의 푯대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14절)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의 빛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너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라]고 부르신 부르심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여행할 때나, 교회에

편지를 쓸 때나, 옥중에 있을 때나, 그는 항상 이 부르심을 생각했다.

(예화) 유명한 성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나이 많으신 스승

그림을 그리다가 붓을 주면서 [네가 이 그림을 완성하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다빈치는 발분하고 정진하여 마침내 대화가가 되었다.

스승의 부르심이 그의 푯대가 된 것이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셨다.

솔로몬은 부귀, 장수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릴 지혜를 구했다.

이 때 하나님이 칭찬하시면서 지혜도 주시고, 장수와 부귀도 주겠다고 하셨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무엇부터 구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큰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큰 시험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잘못 구하면 오히려 큰 화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바른 목적푯대를 올바르게 설정하고

그것을 위하여 달려가야 할 것이다.

(결 론)

이 말씀을 듣거나, 이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이 어디까지, 얼마나 달려왔든지

나이가 젊든지, 연세가 많든지, 사도 바울을 본받아,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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