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받친 아브라함의 믿음(2)
(창 22:1-19, 히 11:17-19)
오늘은 아브라함의 성숙된 믿음의 절정에 대하여 말씀드리며 은혜받고자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나기는 했으나,
[하란]이란 땅에서 머뭇거리며 지체했던 장소도 있었고,
아비 [데라]로 인하여 신앙의 발걸음이 연기되던 때도 있었음을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다.
[마침내, 이루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믿음 (1)]
하나님은 마침내 아브라함을 이끄시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사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던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이 시험에 합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내용이다.
★ 시험에는 두 종류의 시험이 있다.
1)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다.
이것은 성도를 유혹(Temptation)해서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다.
2) 하나님께서 하시는 시험이다.
이것은 더 큰 복을 주시려고 하는 시험(Test)으로 믿음을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시험은 대적하고 물리쳐서 승리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Test)은 “이것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된다고 하셨다. (약 1:12)
즉,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 듣고,
축복받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 (창 22:1)을 보면 :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 주시려고 시험하신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께 시험받을 때에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주시려고 그러시는가를
생각하면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17) 이하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 ”라고 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어떤 믿음으로, 어떻게 순종해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고
인정을 받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처음 얻었을 때의 나이가 100세 였다.
자식이 없던 사람이 100세에 아들을 낳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예화) 40세 넘어 첫 아기(아들)을 난 집사님을 보았는데,
정말 기뻐하고, 그 아들 소중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이야말로 자신의 기쁨이요 소망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아내보다도 더 사랑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자기 생명보다도 더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했는지?” 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테스트)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1절)
하나님은 최고(Best)를 원하십니다.
(2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그냥 이삭 받치라고 말씀하지 않고, 수식어가 많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받치라는 말이다.)
그 만큼 이삭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이삭의 생명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이었다.
과연 100세에 낳은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지를 테스트하신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내 아들이 양 새끼입니까? 염소새끼 입니까?
번제로 받치게요?”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한 마디의 이유도, 불평도 없었다.
1)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유없는 순종이었다.
(3절)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아브라함 편에서 이유를 대자면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ㄱ) 그렇게 데려갈 아들을 뭐하러 주셨나요?
20년 전에 나에게 약속을 주시고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낳은 자식,
이제 기껏 키워놓았더니 번제로 드리라니요?
ㄴ) 누가 보더라도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살인행위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잡아 죽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영광 가리웁니다. 저는 못합니다.
ㄷ) 또 이삭을 이렇게 잡아 죽여 버리면 하나님의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ㄹ) 또한 Wife 사라를 핑계로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와같은 변명의 여지가 있음직함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이유도 붙이지 않고, 아침에 일찍이 떠났다.
사랑하는 예배자 여러분!
하나님의 명령은 논박될 것이 아니라,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순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잠자리에서 업치락, 뒤치락하면서 과연 이삭을 받칠 것이냐?
안 바칠 것이냐?를 생각지 않았다.
간 밤에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났습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과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분이 되었다.
믿음은 순종이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순종을 잘한다는 말과 같다.
몸무게는 체중기로 잴 수 있다. 믿음의 척도는 순종으로 잴 수 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란 말은 아브라함은 순종의 아버지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오래 전에 네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했을 때도 말없이 떠났다.
이번에는 독자 이삭을 받치라는 말씀에도 말없이 순종하고 있다.
2) 아브라함의 순종은 지체 없는 순종이었다.
성경에 언제 바치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순종하고 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지연할 수 없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신앙생활에서 조급함과 서두르는 것도 바른 자세가 되지 못하지만,
지체는 곧, 불순종이 된다.
서두르면 이스마엘을 낳지만, 또한 게으름, 머뭇거림은 곧 불신앙이 된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상의하지 않았다.
만일 아내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면 “아니 이 영감이 노망(dotage) 들었나?
어떻게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말이에요?”하고 못 떠나게 했을 것이다.
신앙생활 할 때 매사에 아내와 상의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했다가는 안 되겠거든요.
혹시나 물으면 역시나 안되는 법이다.
3) 아브라함의 순종은 변함없는 순종이었다.
(4절) 떠난 지 3일 만에 하나님이 지시하는 산(山) 밑에까지 왔다.
우리나라 속담에 “작심 3일”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결심이라도 3일이 지나면 지켜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3일 동안 걸어오면서 별 생각을 다했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현명한 생각인가?
혹시 내가 잘 못 들은 것은 아닌가? 과연 받쳐야 하나?
(예화)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는 마을에 화(禍)를 면하기 위해서
해 마다, 무당이 정해주는 집의 딸을 생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마을의 추장의 딸을 생매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땅을 파고, 추장 딸을 땅 속에 뉘였다.
그런데 이 딸이 갑자기 잠깐만 하면서 일어나더니,
“아빠, 턱에 흙이 묻었어요” 하면서 턱의 흙을 닦아 주었다.
그랬더니, 추장의 마음이 녹아지면서, 무당이고 나발이고 없다.
그냥 가자고 하고 딸을 데리고 갔답니다.
아브라함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도 3일 길을 가면서, 밤마다 이삭이 아버지 어깨도 주물러 주고,
발도 씻어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변함없이 끝까지 순종하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7절)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브라함의 마음이 한없이 아펐을 것이다.
[스펄쳔 목사님]은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모리아 산은 황량했다.
그러나 모리아 산보다 더 황량한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었다.
모리아 산에서 장작은 쪼개졌다.
그러나 더 쪼개진 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이었다.
노(老)족장의 청년이 된 아들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기에는 그 아들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러나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더 무거웠다 고 설교했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십시요.
4) 아브라함의 순종은 방해요소를 제거하며 행한 순종이었다.
(5절) 이에 아브라함은 두 사환에게 이르되 :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아이와 같이 가서 경배하고 오겠노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방해 될 만한 요소들을 제거했다.
이제 산 밑에 까지는 왔다.
그런데 하인들을 데리고 올라가면, 하인들이 이삭을 받치려고 할 때 :
“아이고! 주인님, 왜 이러십니까? 정신이 이상하게 되었습니까?...” 하면서
이삭을 못 받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잘 순종하기 위해서 사환들을 모두 산 아래 두고 올라간 것이다.
내 신앙 생활에서 방해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명예? 교만? 잠? 스포츠? 물질? 이성? ... 모든 방해 요소를 산 아래 버려두고,
하늘에 있는 시온 산을 향하여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5) 아브라함의 순종은 아들까지도 순종하게 만든 순종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또, 크게 은혜가 되는 것은 이삭의 순종이다.
이삭도 역시 순종의 아들이었다. 복 받은 가정이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받치려 해도 이삭이 도망치거나 반항했으면 못 받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행위 앞에서 순종했다.
3일 전에도 아침 일찌기 일어나 따라 나섰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어떻게 아브라함은 이렇게 순종하는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삭이 순종한 것은 과거에 아브라함이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했는가를
보여 준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말한 대로 살지 않고 부모가 행한대로 산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더욱 빛난 것은 자기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도 동질의 순종으로 드려진데 있다.
이제 이삭을 결박하고 단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향해
내리치려 할 때에 하늘로 부터 큰 음성이 들린다.
“아브라함아 ! 아브라함아! .... ” 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을 가르며 들려왔다.
그래, 알았다. 바치지 말아라. 너는 이미 네 아들을 받친 것이나 다름없다.
그 대신 수풀에 걸려있는 수양을 잡아 받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이레의 축복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칼을 든 것은 복종의 표현이요, 신앙의 크라이맥스이다.
아브라함은 처음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변함없이 순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결심도 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온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
용두사미(龍頭蛇尾)의 순종도 있다.
명분만 남고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끝까지 순종한 것이다.
마지막, 아들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그 순간까지 순종을 잘 했다.
마지막 순간에 실패하면 지금까지의 순종은 무효(無效)가 된다.
그렇습니다.
젊은 날에 순종 잘하던 사람은 노년기의 신앙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임종의 순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끝까지 순종 잘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 론)
무엇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런 어려운 시험을 극복하고 순종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지요?
(히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만일, 번제로 받쳐서 정말, 죽였으면 어떻게 하지요?
그 해답이 그 다음절, (19절)에 있다.
즉,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소위 이것을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이라고 말한다.
이제 이렇게 순종했던 순종의 결과가 어떤 축복을 받았나요?
(12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아브라함은 인정받았다.
하나님께 인정받기만 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이제 하나님의 시험(Test)에 합격한 아브라함에게는 큰 축복이 주어진다.
(15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끝으로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꼭 알고 기억해 두어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받친 사건은 :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사건을 예표로 보여준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 산은 후일에 갈보리 산이다.
번제 단을 쌓았던 곳은 후일에 주님의 십자가가 섰던 그 자리이다.
아브라함도 독자 이삭을 받쳤고, 하나님도 독생자를 주셨다.
어린 몸으로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오르던 모습 그대로가
곧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이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아들 이삭을 받칠 때는 아브라함을 Stop시키셨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스스로의 팔을 묶으시고 독생자를 죽게 버려 두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야만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의 사건을 통해서,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 시간, 하나님의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 앞으로 가까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제야 너도 나를 사랑하는 줄 내가 아노라”고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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