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일 토요일

성령을 속인 죄


성령을 속인 죄 (5:1-11)

 

오늘 본문의 사건은 납득하기가 어려운 사건이다.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죽음]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찌 이렇게까지 무섭게 죽어야 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죄가 이렇게 큰 것이었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도행전 5, 그 당시 교회 사정은 오순절 직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였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표적과 기사가 충만한 교회였다.

이웃의 필요를 따라서 나누어 주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였다.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실감하면서 모였던 거룩한 공동체였다.

이같은 아름다운 교회에 옥에 티 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살인죄간음죄 같은 유형의 죄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을 내어 헌금했고 봉사했고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헌금을 받치고 섬긴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봉사하지 않은 사람도 많은 데, 이들은 봉사하다가 죽게 되었다는 말이다.

정말 난처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바치지 않았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괜히 바치겠다고 나섰다가 웬 봉변인가?

업적주의, 결과주의로 보면 그 만큼이라도 바쳤으면 고마운 일인데, 왜 문제가 되었나?

 

여기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교회는 물량적으로 평가하는 곳도 아니고, 업적결과에 의하여 말할 것도 아니다.

보다 이 문제요, 보다는 내용이 문제요, 행위보다는 동기가 문제인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을 팔아서 1/10 이나, 절반만 받쳤다해도,

정말, 많이 바친 것인데 어찌 그것이 죽을 죄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벌을 내린다면 교회 나오는 사람 중에서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것 같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정말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아나니아]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은총 이고

[삽비라] Sapphire = 보석 이름으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런데 둘 다 그 이름과는 다른 삶을 살다가 안타깝게 죽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의 본보기로 보여 준 계시의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이 교회는 성령의 오순역사로 처음 세워진 초대교회이다.

그런 가운데 교회가 처음 세워지면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 있어서는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보기로, 교훈적으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초대 교회는 유무상통하고, 사랑이 있고, 성령이 있고, 믿음이 있고, 구원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는 표본적인 사건이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모양의 죄인들이 나온다.

모두 죄인인데, 다 나와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곳이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이라도 교회 나오는 것을 나무래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영적인 병원이다.

병원에 가 보면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교회는 신령한 병원이므로,

영적으로 병든 죄인들이 나와서 통회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것만은 안 된다는 말이다.

교회에서 이러한 죄악은 절대로 안 된다는 무서운 상징적 의미가 있다.

 

본문은 그 앞의 4장 마지막 절과 연결해야 잘 이해가 된다.

(4:37) 바나바는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이 발 앞에 두니다.

바나바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분으로, 좀 부요한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갖다 맡기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라고 했다.

이 일로 인해서 많은 교인들은 바나바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렇습니다. 바나바가 그 귀한 땅을 팔아 받쳤으니, 많은 교인들이 그를 존경하고

훌륭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칭찬함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이것을 보고 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 속에서 종교적 허영심이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도 그렇게 해서 존경받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

사실, 남들에게 존경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을 팔아서 존경받을 수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되겠다고 쉽게 생각한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특수한 죄이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도둑질이나 살인죄, 우상숭배 죄, 그런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누구에게 강요당한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받친 것도 아니다.

자발적으로 했는데, 죽음까지 이르게 되었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들 부부의 죄가 무엇이었나?

(1) 성령을 속인 죄이다.

사람을 속여도 죄가 크겠거늘 하물며 :

하나님의 성령을 속이고(3) 주의 영을 시험 것이다.(9)

(3절)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9)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이들 부부는 누구에게도 강요받은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임의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책망을 보라.

땅이 그대로 있들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4)

모든 것을 자신의 임의로, 자유롭게 바칠 수도 있었고, 안 바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들 부부는 이렇게 했느냐 는 것이다.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한 것이다.

자발적인 구제행위를 허영심의 동기에서 성령을 속였기 때문에 멸망 당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6:7)

하나님의 성령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2) 진실을 잃어버린 위선의 죄

사람들은 남들이 뭐라고 하는가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쓴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더 그런 것 같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이것 때문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경건한 행위, 선행 안에 침투된 악이다.

사람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선행하고 싶은 때가 있다.

선행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바나바가 땅을 팔아 헌금하니, 자기들도 재산을 다 팔아서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처음에는 그렇게 마음을 먹은 것 같다.

문제는 땅을 팔아서 목돈을 한꺼번에 손에 들고 보니, 생각이 달라진 같다.

이 많은 돈을 다 바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갈등이 생겼다.

 

본문에 : 땅 값 얼마를 감추었다는 사실을 계속 언급되고 있다.

누가 본다고 감추었습니까? 사실 감추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문제는 왜 거짓말을 하고 성령을 속이고, 주의 영을 시험했느냐? 는 것이다.

 

베드로가 땅 값, 이것이 전부냐? 라고 물었을 때 :

반이면 절반입니다, 1/10이면, 십분의 일입니다고 정직하게 말했으면 OK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를 감추어 놓고, 그것이 전부라고 속인 것이다..

소유욕과 인색함과 갈등을 물리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욕심경건을 넘어섰고, 허영심진실을 이기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들 부부는 재물도 지키고, 존경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절반을 바치면서 전부인 체 말한 것이다. (성령을 속인 것이다.)

 

(3) 잃어버린 마지막 기회

베드로가 이것이 전부냐? 물었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정직하게 전부는 아닙니다. 진실하게 대답을 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었을 것인데,

진실한 말 한마디가 없어서 죽어갔다 .

 

아나니아 부부의 죄는 경건을 수단으로 삼은 신학적인 죄가 있다.

(딤전 6:5)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에게 가 있다. 고 했다

경건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신앙은 목적이지 신앙을 이익의 수단로 사용하면 화가 있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모세가 산에 올라갔으나 소식이 없자:

그들은 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였다. 그리고 금송아지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를 범했다.

불신앙적 행위를 가장 신앙적 행위로 위장된 것이다.

 

아나니아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성령을 속이는 죄를 범했다.

가장 아름다운 일이 가장 가증된 동기로 감행되었다.

 

또한 이 부부는 죄 짓는데 서로 궁합이 맞았다. 꿍짝이 맞았다.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정신을 차렸으면, 이런 비극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 되기 전에 먼저 진실이 있어야 한다.

 

(결 론)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렇게 된 모든 것의 배후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었다.

(3) 어찌하여 사탄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가룟유다도 마찬가지였다.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참으로 안타까운 부부로 생을 마쳤다.

헌신믿음이 있는 것 같았으나, 허영위선불신앙 뿐이었다.

헌신의 동기에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이라도 진실했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참된 진실,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에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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