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 7:9-11)

사람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도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형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근심이 습관화 되고, 만성화 된 사람도 있다.

10년 동안 걱정하던 사람은 그 근심의 주파수에 따라서

걱정이 없을 때에도 걱정거리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이 근심을 다스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다.

예수 믿어도 마음의 불안과 근심을 떠내 보내지 못하는 성도들을 본다.

비교적 높은 차원의 신앙이 있는, 믿음의 사람일수록 이 근심을 초월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중심으로 살게 될 때에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근심 없이 마음의 감사함

으로 살아 갈 수 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염려하는 고민과 걱정을 깊은 관심으로 권면해 주고 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세상 근심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붙들려 사는 사람은

가시밭에 씨를 뿌림 받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와 같이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들이 늘 고민하고 걱정하는 근심을 이기라고

권면하고 용기를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살면서 이 근심과

염려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본다.

◉ 근심에는 두 가지 근심이 있다.

1) 무익한 근심 (아무 쓸데없는 근심)

2) 유익한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1) 무익한 근심, 쓸데없는 근심은 :

오히려 사망에 이른다고 했다.

(10절) 세상 근심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이런 근심은 어떤 것인가?

(예) 어떻게 하면 잘 살까?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마 6장)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하면 키가 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잘 생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안 늙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유명해질 수 있을까?

이런 것은 세상 사람들이 갖는 근심이다.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 12:2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2) 유익한 근심.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ㄱ) 나의 실수와 부족을 깨달을 때 찾아오는 근심이 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근심으로 꽉 차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3장) 발 씻어 줄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 씻어 줄 종이 없었다.

우리들은 지도자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인데 어떻게 남의 발을 씻는고?

그 때 주님께서는 하인의 일을 친히 하시면서 본(本)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인자는 섬기기 위하여 왔노라 고 하셨다.

그러면서 대야의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

자기의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노출된 그 밤!

자기들의 부끄러움이 드러난 그 밤에, 제자들은 근심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너무 속이 상해서 괴로웠다.

좀 더 나아가면 근심에 싸이고, 더 나아가서는 좌절되고, 마침내 절망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근심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반성의 차원에서 유익이 될 수 있다.

이런 근심이 계속적으로 유지되면 안 되겠지만, 때때로 나의 실수와 부족을 깨닫고

찾아오는 근심은 유익한 근심이 된다.

(예화) 베드로가 근심에 싸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요 21:17)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바로 얼마 전에 주님을 부인하던 나였는데,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아!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던 것이 가짜였구나.

(예화) 다윗도 차원 깊은 근심에 싸이는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 38:3-4)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시 38:17-18)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죄 때문에 항상 근심하고 고민하는 다윗의 순결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근심은 유익한 근심이다.

ㄴ)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 때문에 :

미움과 환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갖게 되는 근심이 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너희를 떠나간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를 죽일 것이요. 환난도 올 것이요. 감옥에도 가게 될 것이니라.

이런 말씀을 듣게 된 제자들은 :

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는데, 이것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것을 어떻게 할꼬?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갖는 근심이 있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이런 말씀 때문에 도리어 근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다.

(요16:20하) 너희들도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 그러면 이런 근심에 부딪힐 때마다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 첫 번째 근심, 세상 근심에 사로 잡힐 때 :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내가 부끄러운 줄 알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아! 이것, 도무지 내가 믿는 사람으로서 상관이 없는 근심을 하고 있구나! 하고 버려야 한다.

이런 근심은 어디서 생기는 것인가?

공중의 새도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오는 것이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탐욕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쫓아내야 한다.

주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결단하고,

기도하며 은혜를 구해야 한다.

2) 두 번째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ㄱ) 자기 실수에서 올 때 :

주님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음으로 생명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이 있다.(10절)

그렇다고 낙심과 근심에 너무 오래 매여 있으면 절망하여 죽게 된다.

그러므로 아주 절망되기 전에, 주님을 앙모함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어야 할 것이다.

나의 잘못을 깨달을 때, 즉시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 이기심, 내 거짓, 내 죄악 때문에 주님이 날 위하여 죽으셨구나.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데 될 때, 근심의 차원에서 회개의 차원으로 바뀌고,

참으로 눈물 흘린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적인 논리가 아닌 진리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닌 신앙의 방법이다.

내 허물을 보는 순간 부끄럽고, 죄송스럽고, 근심도 되지만, 그 순간 곧 그렇기 때문에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초점이 또 다시 주님에게로 옮겨 질 때 평안이 깃들고 사죄의 은총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예) 이와 같은 기쁨을 다윗이, 베드로가, 루터가, 사도 바울이 경험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기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전의 한 면은 근심이요. 동전의 또 한 면은 기쁨이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요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도리어 회개가 되고, 기쁨이 된다.

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핍박받음으로 생기는 근심이 올 때 :

교회 나가기 때문에 남편이나, 부모님이나, 친척이 핍박할 때,

내가 이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닌가?

예수 믿는 일 때문에 마음에 불안을 느끼며 주님께 나오는 사람이 있다.

이럴 때, 우선, 조심해야 할 것은 :

원망하는 마음, 불평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이와 같은 (원망과 불평하는) 마음이 쉽게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이럴 때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이 해답이다.

(멋진 해답은 아닐지 모르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할 때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예)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을 조용히 읽으면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출회 당하나 보혜사를 보내 주겠다. 보혜사는 위로자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근심이 있을 때, 그가 위로가 되고,

고난이 있을 때, 그가 평안을 주실 것이고,

염려가 있을 때, 그가 용기를 주실 것이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않다고 하셨다.

미움의 감정을 가져도 안 되고, 원망의 마음을 품어도 안 된다.

오직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겠노라고 하셨다.

우리가 홀로 쓰러질 때,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 이것은 금욕주의, 스콜라주의처럼 근심이 있으나, 없는 것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근심이 있으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 근심을 맡기면서, 한편에는 근심이 있고,

또 한편에는 기쁨이 있듯이 근심의 이면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요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20)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요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너희에게로 오시리라.

지금은 근심하나, 너희의 기쁨을 아무도 빼앗지 못하리라.

근심할 때 주님을 바라보면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슬픔이 변하여 위로가 될 것이다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결 론)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세상 근심은 하지 말라.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할 뿐이라고 했다. (10절)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유익하다는 말씀이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으로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유익한 근심이다.

나의 와 허물 때문에 하는 근심은 회개하여 회복하고

주님 때문에 받는 박해와 어려움은 천국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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