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2일 수요일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61:1-3)

사람이 살다 보면 몸을 다칠 때가 있다.

넘어져서 무릎 다치고, 일하다가 칼에 비고, 못 박다가 망치에 손가락 다친다.

외상은 약을 바르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 받으면 된다.

문제는 몸보다 마음이 다치는 경우가 문제이다.

마음의 상처는 다른 사람이 잘 볼 수도 없고, 잘 낫지도 않는다.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원한까지도 생긴다.

사람마다 남들이 잘 모르는 아픈 마음의 상처가 있다.

◉ 마음의 상처의 원인은 :

(1) 자신의 실수나 죄 때문에 :

내가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면서 자책(自責)한다.

내가 잘못 선택해서 이렇게 된 거야... 하면서 괴로워한다.


(2)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남편(혹은 아내)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 많다.

때로는 부모 때문에, 자녀 때문에... 시댁식구 때문에 마음이 상한다.

상처는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 때문에 받는 경우가 많다.

인간 관계로 상처받고, 돈 빌려주고 사기 당해서 상처 받는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배우자, 자녀)을 떠나보낸 다음에 받는 상처가 가장 크다.

떠내 보내고 나서... 후회한다. 좀 더 잘 해드렸어야 했는데...


◉ 상처는 큰 일 때문에만 상처받는 것이 아니다.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는다.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일평생 그 말로 인한 상처를 지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상처는 세월이 약이 되어, 세월이 흐르면서 치유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어떤 말의 상처는 너무 너무 깊어서 세월이 흘러도 잘 치유되지 않는 것도 있다.

(예화) 여학생에게 성폭행을 하고 살해한, 살인마 김길태

          (길에서 태어났다고 지어진 이름)

그는 출생 시부터 멸시와 천대꾸러기로 대접 받으며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이 다 증오의 대상이었다.

세상을 저주하며 살았고, 나쁜 짓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

이런 것은 마음의 상처를 방치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를 방치하고 치유 받지 못하면, 그 영향은 몸으로 찾아온다.

노이로제, 신경쇠약, 소화불량, 우울증, 암 등등. 마침내 죽음의 길로 내몰아간다.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자살)을 하기도 한다.


◉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예수님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어떤 일을 하시는가?

그가 오시면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슬픈 당한 모든 자를 위로해 주신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사역을 말씀하셨다. (눅 4:17-19)

ㄱ)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함 :

가난한 자는 힘이 없어 무시당하는 자를 말한다.

그들에게 희망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신다.

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

마음이 유리 조각처럼 산산 조각나고 깨진 자를 고치신다.

ㄷ)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

포로는 자유가 없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

영적인 포로, 사탄에게 묶인 자, 미움의 포로, 증오의 포로, 원한의 포로,

두려움의 포로, 죽음의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이다.

(2절) :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도 선포한다고 했다.

은혜의 해 = 희년을 말한다.

희년은 모든 얽매였던 것에서 자유 함을 받는 해이다.

그리고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신다.

메시야가 오시면 : 슬픈 자. 마음에 상처 받은 자를 치유하여 주신다는 말이다.



◉ 그러면 어떻게 주님은 :

슬픔을 위로하시고, 상한 마음을 고쳐주시는가?


1) 함께해 주심으로 위로해 주신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전까지 :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고 생각했다. (초월자 하나님)

낮고 천한 인생에게 내려오시라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찾아 오셨다.

그것도 가장 낮은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위해서 찾아 오셨다.



♪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위태한 일 면케 하고 품어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바라네



(예화) 롬 멜 : [상처 입은 사람의 치유] (책)에서 본인의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아들이 큰 고통을 겪으면서 괴로워하고 있다. 왜 고통하는 지는 안다.

그러나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를 모른다.

아들아! 왜 그래? 얼마나 힘들어? 물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더 힘들어 할까 봐, 못 물어본다. 그래서 아버지는 전전긍긍한다.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다가, 한 가지 일을 한다.

아들이 밤에 자는데, 아들 침대에 슬며시 들어가서 눕는다. 천장만 쳐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생각만 하다가 아들이 깨기 전에 다시 나온다.

그 다음 날도 그렇게 하고, 매일 매일 그렇게 계속한다.

아무 도움도 못 주고, 대책도 못한다.

단지 아들 옆에 함께 눕고 고통을 같이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아들이 그것을 안다.

아버지는 아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아시고, 나에게 말도 못하고 있는 것을 서로 안다.

며칠 후에 아들이 깨닫는다.

그러면서 난 외롭지 않다. 

내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는데... 내가 어찌 외롭단 말인가?

다시 일어나야겠다. 그래서 아들이 그 고통에서 벌떡 일어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고, 선물주는 것도 좋지만, 

오히려 찾아가서 함께 해 주는 그 자체가 그를 돕는 것이고 위로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병들었으면 부지런히 찾아가세요.

찾아 가서 아무 말을 안 해도 괜찮습니다.

손 한번 잡아드리고 함께 있다가 오면 됩니다.


(예) 사랑하는 이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를 찾아가서 

무슨 도움을 안 주어도 그냥 찾아가면 됩니다. 무슨 말 안 해도 됩니다. 

굳이 말하고 싶으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위로> = comfort 라고 하는데 :

이 말은 Com(함께) + fort(라틴어 fortare)힘을 돋운다는 뜻이 합쳐진 단어이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위로이다.

주님은 그래서 고통 받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임마누엘로 오신 것이다.

성령님은 Comforter 라고 부른다. 위로자, 상담자(곁에서 위로해 주는 상담자)

(예)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찾아가서 우셨다.

아마도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주님이 공생애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신 것 같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고통을 아시는 주님은 찾아가서 함께하시면서 위로해 주셨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복수형)

임마니엘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단수형)

승천하실 때 :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마 28: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

내가 고통 당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그 시간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화) 흑야 (Night) (엘리 위젤, Elie Wiesel) 1986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음.

그가 마음에 너무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있었다.

그는 독일의 아우슈비치 수용소에서 고통당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가 겪은 대표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 참상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포로 수용소에서 죄수 3명이 끌려 나와 교수형을 받는다.

2명은 어른, 1명은 소년이다. 목을 메달아 사형하는데, 어른 2명은 금방 죽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체중이 가벼워서 죽지 않고 퍼덕 퍼덕거린다.

30분이 지나도 죽지 않다가 오랜 시간 뒤에 혀가 흘러내리며 죽는다.

아우슈비츠 교수대에서 목이 졸려 바둥바둥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뒤에서 누군가가 말한다.

<도대체,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거야? 

하나님은 저 교수대에 매달려 죽으셨어....>

이 광경을 목격한 위젤은 그 이후 일생 하나님에 대하여 등을 돌리고 

완고한 무신론자가 된다.


그런데, 그 기록을 읽은 사람이 있었다. <몰트만> 신학자이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3년 감옥생활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다.)

그가 엘리 위젤의 그 기록을 읽고 :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지금 저 고통당하고 있는 교수대에 함께 매달려 계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가? 만일 고통당하는 교수대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쓴 책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이라는 책이다.

위르겐 몰트만 = 희망의 신학을 말한다.

예수 믿는 자들의 진정한 희망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고통당할 때, 우리와 함께 고통당해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고 했다.



(Cf)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하는 고통을 누가 알아? 네가 알아? 내 남편도 몰라. 내 자녀도 몰라...

그러나 여러분 !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이 아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슬픔 가운데 있는 자가 있습니까?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시리.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그 주님이 함께 하시는 한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감격하며 앞으로 전진 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의 를 용서해 주심으로 위로해 주시고 치유해 주신다.

고통의 원인이 나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괴로워한다.

그 때 주님은 찾아 오셔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주신 최고의 은혜는 <죄 사함>의 은총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예수 = 구원자 란 뜻이다.

우리를 어디서 구원하십니까? 죄에서.



(예)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상처의 뿌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죄>에서 온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상처가 있다. 저의 마음에도 상처가 있다. 가정마다 상처가 있다.

그 상처의 깊은 뿌리를 찾고 찾아가면 결국은 <죄>이다.

그것이 나의 죄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죄일 수도 있고, 제도적인 죄, 

사회적인 죄일 수도 ... 있다. 

어째든 상처의 그 깊은 뿌리는 <죄>이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죄>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해 주셨다. 

(막 2장 중풍병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너무 너무 행복한 선언이다.


중풍병자는 병 고침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죄 사함>을 선포해 주셨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이고 <죄 사함의 확신>이다.

왜 기도 응답이 없는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죄 때문이다.



(예) 삭개오 - 예수님 만난 다음에 회개하면서

<내가 남에게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습니다.>

그 때 주님은 :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모든 축복은 죄 사함과 용서로부터 다시, 시작이 되는 것이다.

내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문제가 막혀 있어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신통하면 ➡ 인통하고 ➡ 물통한다. 고 한다.

하나님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진정한 축복이 시작되어,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듯이, 우리도 남을 용서할 때 치유가 된다.



(예화) 영화 빠삐용 (나비)라는 뜻. (빠삐용 : 실화를 만든 영화이다.)

그는 억울하게 누명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타국으로 피신하여 빠삐용이 자기를 억울하게 누명 씌운 사람을 복수하기 위해 

준비한다. (공소시효 끝나는 날까지 기다리며 복수의 칼을 준비한다.)

그런데 그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마음에 참 자유가 일어난 것이다.

“용서는 나 자신을 증오의 감옥에서 풀어주는 축복을 받는다.”

용서할 때, 참 자유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치유의 역사가 나에게도 나타난다.




3) 우리의 삶에 기쁨과 찬송의 옷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3절)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재 대신에 화관을 주시는 분이시다.

재 = 슬픔의 상징. 끝장을 말한다.

내 인생이 끝장 날 것 같고,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주님은 화관, 꽃다발을 주시고,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윗처럼 주께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슬픔 대신에 찬송의 옷으로 입혀 주신다.

내 옷은 슬픔의 옷, 근심의 옷인데, 주님은 찬송의 옷을 입혀주시는 위로자이시며, 치유자이시다.


(결 론)

오늘 본문은 메시야 사역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다.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상한 자에게 오셔서 함께하여 위로하시며,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ㄱ) 슬픔 대신에 희락을 주시고,

ㄷ)  대신에 화관을 주시고,

ㄹ) 근심 대신에 찬송의 옷을 입혀 주시는 주님이시다.

이런 주님의 위로와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기 도)


내 손을 주께 높이 듭니다 - 찬양의 옷을 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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