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6일 수요일

애통하는 자의 복 / 마 5:4, 시편 51:1-4, 17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시편 51:1-4, 17)


애통하는 자는 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일괴롭고, 슬픈 일인데 오늘 말씀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제일 먼저 피할 것은 슬픈 일, 애통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행복 된 생활이라는 것은 슬픈 일을 피하는 것일 것이며,

반대로 슬픈 일과 애통하는 일이 제거될 때 인간은 행복 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 줄로 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의 노력이라는 것은 애통스러운 일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 고해(苦海) 라고 한다.

그러므로 슬픔을 제거하는 일은 우리 인류의 공동목표라고 해도 잘못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수고와 노력은 모두 이 슬픔과 애통을 당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나 오늘 본 성경 말씀에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많이 애통하는 자는 많이 불행 할 텐데, 오히려 많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설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이것이 우리가 믿는 성경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 곧, 우리 주님의 교훈이요. 성경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

그 앞절에 나온 심령이 가난한 자의 가난이 물질적인 가난이 아닌 것 같이,

여기의 애통도 영적인 애통인 것이다.

영적으로 가난해야 하는 것 같이, 영의 애통과 탄식이 있는 자가 이 있다는 것이다.


(시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구원하시는도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국 교회 교인들이 신앙으로 열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교회 일에 성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결점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세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자세란 무엇입니까?

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하는데, 주리고 목이 마를 줄 모르고 있으며,

죄를 미워하고 참으로 애통해야 하겠거늘, 죄에 대한 탄식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부정적인데서 출발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심령이 먼저 가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참 기쁨이 있기 전에, 참 애통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진실한 애통이 없이는 참 기쁨도 평안도 없음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다.

(요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약 4:9-10) 죄인들아!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 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복의 근원으로 오신 예수님은 웃으신 것보다는 울으신 적이 훨씬 많았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모습은 슬픔을 많이 겪었으며, 그 용모는 분명히 상하여 있었음을 봅니다.

그렇다고 웃는 것 자체가 불경건하다거나, 명랑하지 말라는 것이나, 좋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참 기쁨 전에 참 슬픔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그렇게 고백했다.

그는 로마서 7장의 이러한 괴로움을 8장 1절의 생명의 성령의 법해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8장 23절)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 때문인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기록된 로마서 7장의 고백 속에 :

<내 안에 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어, 원하는 바 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을 행하는도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도 바울같이 죄에 대한 투쟁애통이 없이는 참 기쁨을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죄의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이것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생활정결케 하고 죄를 미워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심오한 죄악논 차원 높은 기쁨의 교리를 체득할 수 있어야 한다.

죄의 파멸성, 죄의 흉악성, 죄의 본성을 응시해야 되는 것이다.

날마다, 자신을 검토하고, 자기 스스로를 깊이 진단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제 기능이 발휘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 뿐만 아니라, 내 성질, 시기심, 감사보다는 불평의 마음,

친구와의 관계, 다른 사람과의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등을 검토해야 할 줄로 압니다.

내 안에 있는 죄의 본성과 내 주변에 있는 죄악들투쟁하면서 죄악 슬퍼하며,

애통하는 은혜를 받아야 할 것이다.

<죄>라는 것은 사탄이 우리 인류에게 보내 준 실체입니다.

참 애통이 없이 참 위로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기능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예화) 다윗, 삼손, 베드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에 대한 참된 애통은 그리스도의 기쁨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할 것이다.

애통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위로평화가 우리 마음 속에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면서 나의 죄를 가르쳐 달라고 계속

간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예화)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에 <임패리얼>박물관이 있다.

그 안에 한 폭의 유명한 일화가 담겨져 있는 그림이 보관되어 있다.

황제가 성당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교가 문간에 나와서 딱 버티고 서서

“못 들어갑니다”고 하는 장면을 그린 역사적인 그림이다.

주후 390년 3월에 데살로니가의 시민들이 로마의 통제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황제 데우도시우스가 무죄한 시민 7,000명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엄청난 잘못(죄)을 저질렀다. 그 후에 데우도시우스 황제가 이태리 밀라노를 방문하였다가

밀라노 성당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가려고 할 때 대주교 암브로시우스

(Ambrosius 340?-397)가 나와서 문을 딱 막고 “못 들어갑니다” 고 하는 것이다.

“왜 못 들어가나?”

“당신은 죄인입니다. 무죄한 시민의 피를 흘린 황제의 피 묻은 손으로는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그 때 황제가 말한다. “다윗 왕도 죄인인데...?”

그 때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다윗 왕을 모방하십니까? 그러면 다윗처럼 회개하셔야지요. 다윗 왕은 회개하였습니다.

당신은 회개가 없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하면서 가로 막았다.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였으나 감독의 거룩한 분노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할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암부로시우스 감독에 대하여 말하기를 :

“나는 나에게 감히 진리를 말해 주는 사람, 하나를 처음 보았다.

그 사람은 감독 될 자격이 있다. 그는 밀라노에 살고 있다”고 했다.

암부로시우스 감독은 황제의 권세 앞에서도 거룩한 복음의 권위를 당당히 지켰다.

유명한 그림이요. 이 이야기는 교회사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

하나님의 집에 못 들어간다.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참된 위로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울며 애통해야 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울어야 한다.

♫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

(결 론)


(시편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참된 애통은 참된 기쁨을 거두게 한다.

참된 애통은 믿음으로 인도한다.

참된 애통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한다.

참된 애통은 1-2번 슬퍼하며 회개했다고 해서 끝나는 단회적인 애통이 아니다.

참된 애통은 시간, 시간마다. 날이면 날마다 자신을 꾸짖고 깨뜨리는 아픔의 눈물이다.

참된 애통은 신앙이 깊어질수록 죄의 문제에 대하여 더욱 민감해지고

날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항상 마음이 가난해 진다.

회개와 후회는 같은 것이 아니다.

가룟유다와 사울 왕은 잘못한 일에 대해서 많이 후회했다.

그러나 회개가 없었다.

어쩌면 다윗은 더 큰 죄인이지만 그는 회개했다.

침상이 떠나가 가도록 울며 지은 죄를 회개를 했다.

(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위로를 받은 것이다.

애통은 뉘우침이 아니다. 애통은 원망이 아니다.

애통은 환경에 대한 핑계가 아니다.

애통은 바라고 소원하던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와 애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한 죄인의 응답이며,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간구하는 것이다.

신령한 애통의 결과는 위로이다.

여기 '위로'라는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곁에"라는 전치사와 "부르다"라는 동사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곁으로 부름을 받아 함께 한다." 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보혜사 성령 (파라클레토스)이라는 말과 같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위로자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회개케 하며, 애통하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며 용서해 주시는 위로의 성령님이시다.

♪ 정케하고 위로하사 복을 받게 합소서 충만하게 하시오니 무한 감사합니다.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 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한 맘 충만하게 합소서. ♫


(예화) 이런 아름다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좋은 그릇을 하나씩 주면서 세상에 나가서

가장 귀한 것을 담아 가지고 오너라.

그래서 세상에 나가 보니까 사람들이 금덩어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금을 모아 보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다 쏟아 버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석을 담아 보았지만 천국에는 이런 것이 얼마든지 많다. 그래서 “다 소용이 없다.” 다 버리고 가장 귀한 것이 뭘까?

천사가 빈 그릇을 가지고 헤멜 때 어디선가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회개하고 감사하면서 통곡하는 눈물 흘리는 음성이 들렸던 것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회개의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천사의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바로 이것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실 것이다.”

그 눈물을 담아가지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애통하지 않는 자위로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도 못하시는 게 있을까?. 회개하지 않는 자를 절대로 구원하지 못한다.

아무리 위로를 베풀고 싶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위로 할 수 없다.

에 대한 통곡애통을 통해서 영혼이 깨끗해지고,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기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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